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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탈리 Aug 03. 2021

냉장고 문을 열었다

세상의 어떤 부자도 부럽지 않다. 엄마가 해준 반찬과 아빠가 사준 과일만 있다면.

지난 주말, 부모님이 휴가를 맞아 우리 집에 오셨다. 멸치볶음과 진미채는 물론, 김, 두부조림, 가지볶음, 장조림, (남편을 위한) 갈치조림과 선짓국, 아빠가 직접 다진 마늘까지. 남도 음식 부럽지 않은 라인업이다. 여기에 아빠가 직접 골라온 딱딱한 복숭아와 체리, 블루베리까지! 부자 된 기분이다. 부모님이 가져온 음식과 과일을 냉장고에 넣고 아빠가 좋아하는 중식 레스토랑의 음식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부모님이 친정에 갔다면 이런 기분일까? 싶을 정도로 잘 쉬다 가신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기분이 너무 좋았던 탓일까. 오랜만에 파이팅이 넘친 탓일까. 저녁을 먹기 위해 냉장고 문을 있는 힘껏 열었다. 문제라면 이미 냉동실 문도 열려있었다는 점이다. 엄마가 해준 반찬을 먹을 생각에 앞뒤 안 재고 냅다 냉장실 문을 열었고.. “악!” 소리와 함께 왼손 중지에 피멍이 들었다. 피는 조금 났지만 괜찮은 것 같았다. 다음날, 친구가 집에 놀러 왔다. 내 손을 보더니 실금이 생겼을 수도 있으니 내일 꼭 엑스레이를 찍어보라고 말했다. 출근하자마자 병원에 갔다. 다행히, 실금이 가지는 않았다. 왼손 중지의 두 번째 마디에 염증이 생겨 부어있는 상태라고 했다. 병명은 타박상. 의사 분이 알루미늄 손가락 보호대를 끼워주시며, “하실 거죠?”라고 했다. 추가 설명을 들은 뒤 회사로 돌아왔다.

크롬하츠 반지 같다, 간지 난다. 는 칭찬을 들어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심미성과 별개로 튀어나온 보도블록에 발이 걸린 것처럼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원래도 왼손잡이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왼손을 많이 썼다고? 할 정도로 왼손을 자주 쓰고 있었다. -그 덕분인지는 모르겠으나 왼손 검지와 약지를 이용해 타이핑 중이다- 문 여는 건 기본이요, 지갑이나 에어팟 케이스를 자연스럽게 왼쪽 주머니에 넣어 놓은 덕분에 오른손을 왼손 주머니에 넣어서 물건을 꺼내는 기인 열전을 펼쳤다.

이 뿐만이 아니다. 노트북 비밀번호를 입력할 때와 트랙패드를 쓸 때. 머리 묶을 때, 밥 먹을 때와 양치할 때, 물이나 커피를 마실 때 등. 필기할 때 빼고는 전부 왼손을 쓰고 있었다. 물 마시거나 양치는 차라리 쉽다. 왼손 중지만 들면 되니까. 이걸 기회삼아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 양치하거나 물을 마시고 싶었다. -회사엔 없어서 아쉽지만- 가장 불편한 건 식사할 때다. 어찌어찌 왼손 엄지와 검지로 젓가락질을 했으나, 반찬이 계속 떨어져 결국 숟가락만 썼다. 저녁에 집에 가면 남편에게 밥을 먹여달라고 해야 하나, 3초 고민했다. 그다음은 타이핑할 때다. 마음대로 자판을 칠 수 없는 이 마음. 나도 모르게 손가락이 먼저 갔다가 오타를 내고, 다시 백스페이스를 누른 뒤 검지나 약지로 쳐야하는 이 설움. 손가락 하나가 불편할 뿐인데, 다방면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마냥 불편한 점만 있는 건 아니다. 일단 회사 사람들의 이목과 관심을 받을 수 있다. 오늘처럼 한가한 날엔 이야기를 나눌 구실이 된다. 아니 어쩌다가..? 어제 냉장고 문을 열다가 이렇게 됐어요. 금 간 건 아니고 부어있어서 조심해야 한대요… 아, 근데 어제 올림픽 보셨어요? 올림픽 이야기로 30분 뚝ㅋ딱ㅋ하고 자리에 앉아 광고를 보고 있으면, 누가 나타나 손이 왜 그래? 하며 물어본다.프로젝트 때문에 바빠서 미뤄두었던 소셜라이징을 할 수 있다. -사실 다치지 않아도 할 수 있지만… 다쳤고 오늘은 한가하니 그렇다고 해두자-

괜찮은 마감재를 쓴 건지 있어 보인다. 오늘의 룩과도 컬러감이 잘 맞아서 기분이 좋다. 무엇보다 다시 한번 나를 재정비하는 기회가 됐다.

손에 보호대를 끼고 있으니, 이전에는 무리 없이 하던 일들을 노력해야 한다. 직장생활 같달까. 이전엔 100을 내려면 300 이상을 했어야 했다. 일이 익숙해지고, 자신만의 틀이 생기면 300이 200으로, 150으로, 그러다 70으로 줄어든다. 큰 힘이 들지 않게 되면 관성을 탄다. 관성적으로 일하면 언젠가는 다치게 된다. 다 된 것 같다고 그냥 보내지 말고 맞춤법 검사기도 돌려보고, 피드백에 맞게 고쳤는지 두 번 더 체크하면 부상을 방지할 수 있다. 사실 요새 나사가 풀려있었다. 파일명을 확인 안 해서 클라이언트에게 이전 버젼을 보낸 적도 있고, 내부 미팅 때 다른 발췌본을 공유한 적도 있다. 아래 친구가 알아서 잘 했겠지. 하는 마음으로 파일을 더블체크 하지 않은 적도 있다. 클라이언트가 보내준 브리프를 세 번이나 읽었는데도 놓쳤던 부분이 있었다. 이런 자잘한 무신경함이 합쳐져 냉장고 문에 손을 찧은 게 아닐까. 입으로는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고, 일을 더 잘해서 몸값을 올리고 싶다고 한다. 하지만 습관을 들이다 만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일주일 간 손가락 보호대를 해야 한다. 그래도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니 보호대를 뗄 즈음엔 신경씀의 고수가 되어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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