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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탈리 Aug 04. 2021

요즘 것의 긍정

긍정적인 글을 나누고 싶다. 굳이 내가 쓰지 않아도 세상엔 혐오와 차별과 비난이 난무한다. 사실, 그만한 열정을 들일 주제도 아니다.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가 시행되며 출퇴근을 택시로 한다. 덕분에 아침 시간을 활용하는 방법이 다양해졌다. 회의가 있는 날엔 아이디어의 핵심이 되는 키 카피를 더 써보거나, 내 아이디어를 잘 보여줄 수 있는 레퍼런스 이미지를 찾거나, 발표할 덱의 구성을 수정한다. 그 외의 날엔 TED나 삼프로 TV 등의 유튜브 콘텐츠를 보거나, 글을 쓰거나, 잔다. 멀미가 심해 지하철로 출퇴근할 때처럼 독서는 하지 못한다.


차에서 무언가를 할 땐, 아이패드를 되도록 쳐다보지 않는다. 강연 콘텐츠의 경우, 오디오가 핵심이니 메모할 때만 화면을 본다. 글을 쓸 땐 눈은 차창 밖의 한강을 향한 채로 의식의 흐름 기법처럼 쓴다. 그렇지 않으면 눈이 금세 피로해지고 멀미가 난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숨은 그림 찾기 같다. 나무나 다른 식물들은 거의 그대로 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나가는 차나 하늘 위의 구름, 광량은 매일 바뀐다. 오늘은 고흐의 작품인 ‘사이프러스 나무’ 같다. 이촌 한강 공원을 지나는 순간 정체가 풀린다. 신기하다. 아무리 막혀도 이 구간만 지나면 소통이 원활하다.


어제 퇴근길엔 세상을 바꾸는 시간(약칭 세바시) 채정호 가톨릭대학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님의 강연을 보았다. 긍정에 관한 강연이었는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긍정-다 잘 될 거야!-이란 현실을 왜곡해서 생각하는 거라는 내용이었다. 채 교수님이 말하는 긍정이란 현실을 직시하고, 할 수 있는 일을 실천하는 것이다.




나는 그걸 긍정이 아닌 희망으로 생각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오늘 칼퇴각이다! 하고 6시 50분부터 슬그머니 짐을 챙겼는데, 광고주가 7시에 피드백을 준다며 연락했을 때. 아니면 파트너사 쪽에서 우리 예산이 얼마 없지만 이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요?라고 터무늬 없이 큰 캠페인을 기획해달라고 할 때. 뭔가 지금 상황은 모르지만 잘 될 것 같아! 는 마음을 가졌다가 절망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전자의 경우는 그래.. 기대한 내 잘못이지. 하고 넘기면 그만이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다르다. 이미 그쪽의 태도에 반쯤은 이 프로젝트 안 할 것 같아, 는 마음으로 임한다. 하다 보면 너무 진심이 되지만 말이다. 안 할 것 같지만 전력을 다 해야 하는 게 광고일인 이유에서다. 그렇게 시간과 노력, 생각을 들인 프로젝트가 팔리지 못한 채 없어지면 굉장히 속상하다.


계속 속상한 채로 있을 순 없으니까. 다음에 비슷한 프로젝트가 있으면 참고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폴더 정리를 한다. 파일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부족했던 부분을 복기한다. 그러면 부정적인 감정은 사라지고 결과만 남는다. 타이트한 스케줄에서도 이만큼이나 했네. 많이 늘었다. 잘했다. 스스로에게 칭찬 한 번 날려주고 아트님에게 커피 한 잔을 사달라고 한다.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점들이 채 교수님의 긍정이라고 하니. 나름 잘 살고 있었군. 하고 생각했다.


기사님이 에어팟을 꺼내 한쪽 귀에 낀다. 그의 공간인 택시에서도, 그만의 심리적 공간이 필요할 때가 있다. 차는 벌써 영동대교를 지나 성수역을 향해 신나게 달린다. 오랜만에 제대로 몰입했다. “오늘 많이 밀렸죠?” “아니에요. 평소보다 빨리 도착했어요.” 밀리는 도로에서 가능한 빨리 손님을 목적지까지 데려다준다. 그게 기사님의 긍정이다. 나의 긍정에 관해 생각해본다.


회사에 들어와 가장 먼저 손을 씻는다. 텀블러에 물을 가득 담고,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켠다. 바쁘지 않으면 일분톡이나 부딩, 뉴닉 등의 뉴스레터를 확인한다. 그 후 새로운 광고가 나왔는지, 놓친 광고가 있는지 찾아본다. 마음에 드는 광고는 넘버스에 따로 기록한다. 진짜 좋은 광고는 남편에게 공유한다.


오늘 오전엔 미팅이 있었다. 새로 시작한 프로젝트로, 광고주 측에서 제안서가 마음에 들었는지 2차 미팅을 하러 우리 회사로 왔다. 세부 사항을 논의하고 나니, 한 시간 반이 지나있었다. 회의실에 바로 다른 팀이 들어와 점심은 자리에서 먹었다. 너무 조금 싸간 탓일까. 세 숟가락 먹었더니 끝났다. 마침 집에 원두도 떨어졌겠다, 좋아하는 카페까지 산책 겸 나갔다. 좋아하는 팀원 분 간식과 내 간식을 사고, 원두도 사서 돌아왔다. 저녁엔 많이 선선해진 것 같았는데. 낮엔 아직도 걸을 때 땀이 주르륵 난다.


나른한 오후 3시. CD님께서 한 팀원이 작성할 컨택 리포트에 대한 도움을 주라고 하셨다. 그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유튜브로 레이아웃이나 디자인에 대해 공부하며, 그가 자신의 일을 할 때까지 기다린다. 결국, 그는 퇴근 1분 전에 문서를 내게 넘겼다. 본인이 보내겠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아트님이 그에게 CD님이 당신에게 요청한 일 아니냐고 한다. 그는 동문서답한다. 검수한 파일을 그에게 다시 보내고 퇴근했다.


예전엔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을 못 견뎌했다. 그 분야의 전문가로 돈을 받으면서 일을 이렇게 하다니. 세바시를 보고 나니 이 생각도 잘못된 긍정이었나 싶다. 이제는 이런 사람과 함께 일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해야 하는 일에만 집중한다. 몇 날 며칠 욕하고 짜증을 내도 바뀌는 건 없다. 어차피 그 일은 해야 하는 것이고, 그 사람은 그대로다. 고통받을 에너지를 일에 사용하면 훨씬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 월급 노동자로 일하는 동안엔, 내 능력으로 높일 수 있는 가장 큰 자산은 연봉이다. -투자나 투잡은 부수익을 줄 뿐이다- 앞으로도 억울하고, 짜증 나는 순간들은 많이 찾아올 것이다. 그때마다 감정이 태도가 되지 않게, 잠깐 산책을 다녀오거나 카페에 가거나. 아니면 자리를 옮겨 할 일을 하자.


감정은 순간이지만, 결과는 나를 따라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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