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엄마가 계란을 삶아 주시면, 흰자는 내가 먹고 노른자는 동생이 먹었다. 삶은 계란의 흰자를 유독 좋아했다. 입안에서 터지는 탱글탱글한 식감. 마치 캔버스처럼, 물감이 돋보일 수 있는 배경이 되는 담백하고 슴슴한 맛이 좋았다. 소금을 찍으면 소금 맛이 온전히 느껴지고, 떡볶이 국물을 찍어 먹으면 떡볶이 맛이 배가된다. 반면, 노른자는 입안에서 부서지는 질감과 냄새가 내 취향은 아니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노른자를 먹지 않았다. 급식에 나오는 메추리알 장조림도 당연히 먹지 않았다. 메추리알은 너무 작아서 노른자를 따로 뺄 수 없었으니까. 반 노른자 파였던 내 신념을 흔든 사건이 일어났다.
그날도 우리는 아지트에 들렸다. 벽면에는 신화 브로마이드가 덕지덕지 붙여져있는 자그마한 공간. 옥색 의자와 원래는 같은 색이었을, 색이 거의 바래 아이보리로 보이는 테이블이 옹기종기 모여있던 곳. 창백한 테이블 위에는 새까만 윤기를 내는 김밥 두 줄과 노릇한 모둠튀김, 그리고 다홍색 떡볶이가 김을 모락모락 내고 있었다. 네 쌍의 젓가락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시험 범위 얘기, 좋아하는 컨텐츠 얘기 등을 하다 보니 비닐에 싸인 분식집 옥색 접시의 불투명한 바닥이 보였다. 남은 것은 김말이 반쪽과 계란 두 개가 남은 떡볶이 접시뿐이었다.
“잠깐 스톱!”
“왜?”
친구가 숟가락으로 노른자를 부셔 떡볶이 국물에 비비고 있었다. 저렇게 맛없는 걸 어떻게 이렇게 맛있는 거에 비벼..! 여섯 쌍의 눈동자가 나를 의아하게 보고 있었다.
“나 노른자 싫어하잖아..”
“이건 달라. 먹어보고 나 말해.”
친구가 한 숟갈 크게 떠서 내 입에 갖다 대었다. 으.. 텁텁한 노란색과 발갛게 예쁘던 떡볶이 국물이 만나 이도 저도 아닌 색이 됐다. 질감은 또 어떻고.. 정말 먹기 싫었다. 그렇지만, 친구가 줬으니까 눈 꽉 감고 먹었다. 생각보다…
“괜찮은데?”
친구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진심으로, 맛있었다. 노른자가 떡볶이의 매운맛을 잡아주었다.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고소한 맛도 은은하게 느껴졌다. *이런 맛도 있구나.* 맛의 팔레트에 새로운 물감이 추가되었다. 그날 계란 노른자를 부신 떡볶이 국물은 내 차지였다. 그렇게 나는 조건부로 노른자를 먹을 줄 아는 청소년이 됐다. 아직 경험하지 못한 맛이 많다는 생각에 새로운 시도를 즐기게 됐다. 호불호가 강한 성향이라 한 번 아니면 절대 아닌 것이었는데, 조금씩 유연해졌다.
음식뿐만이 아니다. 사람도 그렇다. 계란 노른자를 비빈 떡볶이 국물 같은 사람이 있다. 전 회사 CD 님이 그랬다. 그분은 진골 직장인이다. 자신보다 회사를 생각하고, 용암처럼 뜨거운 국밥을 3분 만에 해치우는 주변에 있는 직장인 아저씨 말이다. 그분을 처음 봤을 때 *와, 나랑 진짜 안 맞겠는데?* 라는 생각을 했다. 그분과 프로젝트를 하며 편견이 깨졌다. 분명 아재 같은 면이 있지만 감각은 요즘 애들만큼 세련됐다. 게다가 부하 직원을 챙길 줄 아는 속 깊은 분이셨다. 그 분 밑에서 일하며 어른스러워지는 법을 배웠다.
사람이 모인 회사도 마찬가지다. 나는 여러 회사를 돌아다니다 전 직장에서 5년을 근속했다. 회사 다니는 게 즐거웠고, 배울 분들이 많았다. 종종 이직 제안을 받으면 3초 고민하고 거절하곤 했다. *이렇게 잘 맞는 조직이 있는데, 굳이 새로운 곳에 가야 할까?* 직장에 다닌 지 5년이 되던 날, 남편과 떡볶이 파티를 했다. 남편에게 추억의 맛을 보여주겠다며 삶은 계란의 노른자를 떡볶이 국물에 비볐다.
“스탑!”
“왜?”
“그걸 왜 국물에다 비벼?”
나는 예전의 내 친구가 그랬던 것처럼 노른자가 섞인 떡볶이 국물을 숟가락으로 떠 남편 입가로 가져갔다.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미간을 찌푸린 채로 받아먹었다. 숟가락이 받침대에 채 닿기도 전에 그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 순간 깨달음을 얻었다. *새로운 맛을 알 기회를 차단하는 게 아닐까.* 한 번 사는 인생, 가능한 다양한 맛을 경험하고 싶어졌다.
며칠 뒤, 오피스가 한적했다. 유튜브 메인을 스크롤 하다 한 여성의 인터뷰를 보게 되었다. 그녀는 미국 비밀 정보국 출신으로, 민간인 신분이 되고 난 뒤 <Becoming Bulletproof>라는 책을 출간했다. 책의 내용은 그녀의 직장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힘든 상황에서 나를 추스르는 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인터뷰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움직여야 발전한다’는 것이다. 목표를 정하지 않아도, 움직이면서 때에 맞게 바꾸면 된다고 했다. 움직이지 않으면 고이게 된다. 움직이지 않으면 그렇게 될 것 같았다. 퇴사를 결심하고, 퇴사를 하는 날에도 불안했다. 모든 결과가 노른자를 푼 떡볶이 국물 같지는 않을 테니까.
퇴사하고 삼 개월 정도가 됐다. 가정주부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집을 가꾸고, 먹고 싶은 반찬을 만들고, 원할 때 빨래를 할 수 있는 것도 굉장한 사치인 것 같다. 곧 있으면 큰 결정을 해야 한다. 이 결정이 계란 노른자를 푼 떡볶이 국물이 될지, 반대의 결과가 나올지는 모른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좋은 경험을 했다고, 새로운 맛을 하나 더 찾았다고 생각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