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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탈리 May 05. 2020

이 사람은 왜 취소 대신 '회수'를 썼을까?

막내 카피라이터가 잘 쓰려고 기록한 것들

 ‘안녕하세요, 방금 전달드린 사항을 회수하겠습니다.’ 얼마 전 받은 이메일이다. 이 사람은 왜 취소 대신 ‘회수’를 썼을까? 글은 현물이 아닌데. 일하는 내내 저 ‘회수’라는 단어가 내 신경을 건드렸다. EBS의 <나’도’ 작가다>에 참여하기 전에도 고민했다. 유튜브 대본도 쓰는 카피라이터니까 반절은 나’는’ 작가다.라고 하는 게 맞지 않을까? 그렇지만 글은 쓰고 싶어, 너도 작가야? 나도! 라는 뉘앙스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카피라이터라고 하면 말을 ‘만든다’고 많이들 생각한다. 지금 어떤 말을 많이 ‘쓰는지' 파악하는 게 나의  일이다. 맞는 말을 찾고 나면 일이 쉬워진다. 여기에 ‘는’을 쓸 것인지, ‘도’를 쓸 것인지 고민하는 거다. 원래부터 그랬냐고 물어보신다면, 아니라고 대답하는 게 인지상정. 광고업에 발을 들이기 전 나는 조사와 부사를 즐겨 썼으며, 내 문장을 공작새처럼 부풀리기를 좋아했다. 지금도 그렇다. 조금만 긴장을 풀면 문장이 도스토옙스키처럼 늘어난다.


 나는 매일 문장을 수집한다. 모든 단어에는 의도가 숨어있다고 생각한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단어는 자신이 생각하는 틀 안에서 나오는 것이니 말이다. 친근감 혹은 어수룩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 ‘아니, 그래서, 근데’ 같은 조사를 자주 사용하기도 하고, 감정을 적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몇 시간이고 맞는 단어를 찾아보기도 한다. 카피라이터는 원래 다 이렇냐고? 만들어지는 거다. 틀을 잡고 단단해지는 과정이 어렵다. 당신의 눈길을 끄는 화보 사진처럼, 모든 레이어가 합쳐졌을 때의 결과물이 나다. 백그라운드 컬러나 이미지 혹은 폰트가 조금만 이상해도 어그러진다.


 시작할 땐 모든 게 꽃밭이었다. 문장 하나만 쓰면 사람들이 놀라서 쓰러질 것 같고, 광고주가 내 카피를 ‘수정 없이’ 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현실은 반대다. 문장 하나를 쓰면 고칠 게 너무나 많고, 많다. 수정이 인생이다. 불필요한 말을 다 걷어냈다고 생각하지만, 누군가에겐 허점이 보이기 마련이다. 몇 날 며칠을 밤새서 쓴 문장이 몇 초 만에 퇴짜 맞을 때. 한 우물만 팔 데까지 팠는데, 엥? 이 우물이 아니라 다른 우물인데.라는 말을 들을 때. 출발선보다 더 뒤로 밀려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떻게 보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보니 출발선 근처에는 온 것 같다. 입사 6개월 만에 내가 쓴 카피가 광고주 보고 덱에도 들어가고, 광고주의 셀렉도 받았기 때문이다. 


 이제 카피의 ‘ㅋ’ 정돈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유튜브 콘텐츠 제작 건이 들어왔다. 유튜브는 보기만 할 줄 알았는데 써야 한다니. 다시 시작점을 만났다. 학부에서 진작 대본 좀 써볼걸.이라는 생각이 마구 들었다. 게다가 자동차 콘텐츠 대본을 써야 하니 막막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부족해서 현재의 부족함에 집중하기보다 작업을 끝내는 데 매진했다. 방송 대본도 많이 참고했다. 대본의 결이 다르지만, 구성면에서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자동차도 마찬가지. 여태껏 자동차는 탈 줄만 알았지 관심이라곤 하나도 없었는데, 차를 탈 때 서스펜션이라든지 1열의 편의사 양 등을 나도 모르게 생각한다.


 아직 유튜브 작가로선 어설프고 서툴지만 나름의 틀을 잡아가는 중이다. 첫 촬영이 끝나고 PD 님과 보완점을 의논했다. 대본 구성 시 RT(러닝 타임)가 5분 이내여야 할 것, 각 장소에서 찍어야 할 부분을 나눌 것 등. 두 번째 대본은 그 피드백을 반영하여 수월하게 작성할 수 있었다. 두 번째 대본을 쓰는 사이, 첫 유튜브 콘텐츠가 업로드됐다. 모니터링을 하는데, 자기 연기 보는 연기자의 기분이 이럴까 싶었다. 너무 오글거려서 10분짜리 영상을 한 시간에 걸쳐서 봤다. 영상을 보며 내가 그때 이 단어를 왜 썼지?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이상한 부분들은 오답노트처럼 기존 대본에 표시를 해두었다. 이렇게 ‘알못’에서 ‘알’로 가는 중이다.


 시작은 반이다. 반을 가면 새로운 시작이 나타난다. 카피라이터로, 유튜브 작가로, 사이드 잡 에디터까지. 게임 캐릭터처럼 매번 새롭게 시작한다. 시작들이 쌓이면서 도착점에 가까워진다. 예를 들어 이전에는 5일을 고민해야 도착했는데, 지금은 3일이면 도착하는 식이다. 언젠가는 한 걸음만 걸어도 결승에 도착하는 날이 올 거다. 그날만 보고 걷는 중이다. 세상에 완벽한 건 완벽이라는 단어밖에 없다.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고, 더 나아지기 위해 걸어가는 거다.


 이 글은 나의 무수한 시작들을 발췌한 글이다. 도전기라고 말하긴 그렇다. 카피라이터로서의 삶이 끝나지 않았기에, 앞으로도 도전기라는 단어를 쓸 일은 없을 것 같다. 인터넷에서 본 웃긴 짤 중에 기억에 남는 게 있다. 데뷔한지 10여 년이 지난 연예인이 무대 시작 전 아직도 “이제 시작이야!”라고 해 그만 좀 시작하자고 한다는 캡처였다. 그가 왜 어떤 마음으로 그 말을 했는지 알 것 같다. 시작은 영원하며, 끝 또한 또 다른 시작이다. 아직도 혼자만 출발선에 머물러있는 느낌이라면, 한번 뒤돌아보길 바란다. 당신이 걸어온 자잘한 발걸음이 보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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