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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이티브스피커 Nov 15. 2021

거북이는 어디로 갔을까?

  

“왜 고향에 안 갔어? 기차표 못 구했어?”      

대학생 시절 명절 때마다 선배들에게 듣던 질문이다. 집이 서울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다음 명절 때 또 똑같은 질문을 받곤 했다. 지금도 사람들은 대부분 내 고향이 충청도 어디쯤일 거라고 생각한다. 아니 적어도 서울 사람은 아닐 거라고 확신한다. 아마도 내 행동이 다소 굼뜨고 내 말 속도가 느리고 좀 어리숙해 보이는 외모 때문일 거라고 짐작된다.


지금 생각하면 모든 것은 속도의 문제였다. 사람들이 나를 뭔가 특이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사실 내가 세상의 속도와 다른 속도로 가기 때문일 거다. 내가 볼 때는 사람들의 속도가 너무 빠른데 그 속도 위에 올라타 있는 사람들은 그 속도감을 못 느끼는 것 같다. 나는 그렇게 줄곧 세상의 속도 안에서 삐그덕거렸다. 세상과 나는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이다가 일정한 시간마다 한 번씩 맞물려 돌아가는 두 개의 톱니바퀴처럼 닿았다가 떨어지고 닿았다가 떨어지면서 시간을 지나왔다.  

    

세상의 속도에 맞춰서 살다가 내 주변의 속도가 너무 빠르게 느껴지는 순간 나는 거북이처럼 머리를 몸속에 집어넣고 오히려 속도를 줄이고 줄여서 0에 수렴시켰다. 그건 내 의지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해서 본능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 같다. 내 몸은 본능적으로 내 속력을 지키려고 했지만 내 머리는 내 몸의, 내 인생의 적정 속력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서 항상 손이 빠른 사람들 머리가 빠른 사람들 말이 빠른 사람들 아무튼 뭐든 빠른 사람들 앞에서 줄곧 주눅 들어 있었고 그만큼의 속력을 내지 못하는 원인을 내 노력 부족으로 돌리면서 살아왔다. 결국에는 항상 그 집단이 원하는 속력을 내지 못해서 떨궈져 나와야 했다. 내 인생에 그렇게 실패가 쌓여 갔다.     


신기율 작가의 책 ‘직관이 보인다(2015)’ 중 ‘노력중독’ 부분에 이런 대목이 있다.     


누군가의 게으름이나 나태함은, 그만의 리듬이라는 전체적인 균형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단순히 의지의 문제만은 아니다. 특정한 시간과 사건만 가지고 판단하는 것으로는 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바다에서 유유히 헤엄쳐야 할 거북이가 왜 굳이 육지에서 토끼랑 경쟁해야 할까? 이런 상황에서 거북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자신이 거북이임을 빨리 알아보는 것이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육지의 레이스를 끝내고 본래 자신이 있어야 할 바다로 가는 것이다.     
노력은 사람마다 그 모습과 속도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토끼의 노력과 거북이의 노력은 다르다. 각자의 몸이 다르기 때문에 저마다의 호흡과 리듬도 당연히 다르다. 똑같을 수가 없다.     
그런데 노력이라는 말속에는 ‘우리는 모두 같다.’라는 묘한 전제가 숨어 있다. ‘노력하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말은, 모든 인간들은 노력하면 어느 정도 비슷한 성과를 낼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거북이 같은 몸을 가진 사람도 노력만 하면 토끼처럼 잘 뛸 수 있다고 믿게 만든다.    

  

다소 긴 내용을 그대로 옮겨 쓴 것은 너무나 내 마음 같아서 다르게 바꿀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읽고 얼마나 위로를 받았는지... 거북이는 자신이 거북이임을 알아차리고 빨리 토끼와의 레이스를 끝내고 원래 자기가 있어야 할 바다로 가야 한다. 즉 거북이만의 ‘적소’를 찾아가야 한다.      


‘토머스 암스트롱’이 지은 ‘증상이 아니라 독특함입니다. 부제: 부모와 교사를 위한 신경다양성 안내서(2011)’에는 신경다양성을 가진 개인에게 ‘적소 구축’이 매우 중요한 삶의 전략이라고 쓰여 있다. (p.46-54)


그러나 ‘적소’를 구축하는 것이 단지 신경다양성을 가진 개인에게만 필요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인생의 성공은 주변 환경을 자신의 고유한 뇌의 요구에 맞춰 수정하는 것(적소 구축)에도 달려 있다..... ‘적소 구축’이란 유기체가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자신의(또는 다른 종의) 주변 환경을 변화시키는 과정을 나타낸다.     
적소 구축에는 신경다양성을 가진 개인의 특수한 요구에 맞는 직업 및 생활양식 선택, 보조공학, 인적 자원, 삶의 질을 높여주는 기타 전략이 포함된다.     
이 거대한 삶의 그물망 안에서 자신의 특별한 ‘적소’를 발견할 수만 있다면, 자기식의 성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는 모두 자신을 위한 그런 적소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주변 환경을 변화시키고 있다.     


생각해 보면 마치 금방 엄마 뱃속에서 나온 아기가 본능적으로 엄마 젖가슴으로 이끌려 가듯이 나 또한 본능적으로 또는 결과적으로는 내 속도에 맞춰 내 적소를 찾아다니고 환경을 나에게 맞게 구축하며 살아온 것 같다.  나는 오래전부터 어떤 일을 해야 할 사회적인 적정 시기와 상관없이 살아왔다. 다만 내 인생 어딘가에서 그걸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결혼할 때가 돼서 결혼을 했고 아이를 만나고 싶을 때 다행히도 아이가 내게 왔다.      


이 글을 끝내기 전 내가 몇 가지 개념을 혼용해서 썼다는 걸 말해야겠다. 일상 언어생활에서 흔히 혼용하는 ‘속도’와 ‘속력’은 사실 국어사전만 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없다. 섞어서 쓰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      


표준국어대사전
속도: 물체가 나아가거나 일이 진행되는 빠르기.
속력: 속도의 크기. 또는 속도를 이루는 힘.     
고려대한국어대사전
속도: 일이 진행되는 빠른 정도. 물체가 움직일 때, 그 빠른 정도.
속력: 움직이는 것, 특히 차, 배, 비행기 따위가 이동하는 빠르기의 힘. 단위 시간에 이동하는 거리로 나타내며, 그 단위 시간에 따라 초속, 분속, 시속 등으로 나타낸다.     


그런데 물리학의 개념어로서의 ‘속도’와 ‘속력’은 큰 차이가 있다. 움직이는 물체의 빠른 정도와 움직이는 방향을 함께 나타내는 양을 속도라고 한다. 속력은 방향에 대한 정보 없이 빠른 정도만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속도와 다르다.  물리학에서 크기와 방향을 갖는 양을 벡터(vector)라 하고, 크기만을 갖는 양을 스칼라(scalar)라고 한다. 따라서 속도(velocity)는 벡터이고, 속력(speed)은 스칼라이다. 그리고 속도의 크기가 속력이다.     


속력은 물체가 얼마나 빨리 움직이는지만 알려주는 반면에 속도는 물체가 얼마나 빨리 움직이는지,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지를 알려준다. 만약 자동차가 60으로 주행한다고 알려진 경우 속력이 규정된 것이고 자동차가 북쪽으로 60으로 주행한다고 알려진 경우 속도가 규정된 것이다. 두 물리량은 원형 경로의 움직임을 고려할 때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물체가 원형 경로로 이동하고 시작 지점으로 돌아오면 평균 속도는 0이지만 평균 속력은 원의 원주를 걸린 시간으로 나누어 얻을 수 있다. 이는 평균 속도가 출발점과 끝점 사이의 변위만 고려하여 계산되는 반면, 평균 속력은 총 이동거리만 고려하기 때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속도 [Velocity] (물리학백과)     


한 마디로 빡세게 달려왔는데 결국 제자리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가끔 세상의 빠르기에 지쳐 속력을 0에 가깝게 줄이더라도 내 인생의 속도가 0이 되는 일은 없게 조금씩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 거북이의 속도가 아닐까? 나는 오늘도 살짝살짝 브레이크와 액셀을 번갈아 밟으며 나의 적정 속력을 유지한다. 내 인생의 속도를 잃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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