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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이티브스피커 Nov 15. 2021

D.P.

고통스러운 기억의 봉인 해제... 그리고 치유의 시작

얼마 전 어느 토요일 밤, 저녁을 먹고 엄마와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도 볼 만한 프로그램이 없었다. 그때 문득 낮에 아이와 갔던 안과에서 본 종이 신문 속 기사가 생각났다. 배우 ‘정해인’의 인터뷰 기사였다. 안 그래도 그 배우의 근황이 가끔 궁금했는데 최근에 군대 드라마를 찍었다고 한다. 나는 넷플릭스로 넘어가서 ‘정해인’이 나오는 ‘D.P.’를 찾아 플레이를 눌렀다.      


첫 회를 보는데 보기 힘든 폭력과 학대의 장면들이 이어진다. 내가 가장 보기 힘들어하는 장면들이다. 제발 빨리 이 장면이 지나가기를 바라면서 눈을 가리게 되고 입에서는 으으으 하는 신음소리가 절로 나왔다. 나와 엄마는 중간중간 “보지 말까?” “끌까?” “그래. 도대체 저게 뭐냐.” 하면서도 드라마에서 눈을 떼지도 차마 끄지도 못했다. 그렇게 새벽 3시까지 6편을 내리 보고 말았다.      


나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강렬하고 복잡한 감정에 휩싸여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언제나 있었고 누구나 알고 있지만 항상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돼 버리는 일.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데 당연한 듯 버젓이 존재하는 일. 용납될 수 없는 일이 용납되고 있는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의문이 나를 압도했다. 대상을 특정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다음 날부터 인터넷을 통해서 DP에 대한 감상과 반응을 살피기 시작했다. DP에 대한 관심과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감독, 작가, 배우의 인터뷰 기사가 가득했고 여론에 영향을 미치려는 사람들은 누구나 DP에 대해서 한 마디씩 안 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그리고 드라마의 진짜 주인공들인 군 경험자들이 댓글로 자신의 군 경험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설마... 요즘 군대가 저럴까?’하는 의구심에 ‘저건 진짜다. 나도 그랬다.’ 하면서 자신이 당했던 거, 본 거, 들은 거, 억울한 거, 안 변한 거를 두서없이 마구 이야기한다.    

  

나는 문득 이 드라마가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드라마가 청년 시절 고통스러운 기억을 없었던 듯 깊숙한 곳에 묻어두고 살고 있는 모든 남자들을 어루만져주는 것 같았다. 그건 당연한 게 아니었다고. 네가 느낀 그 분노와 억울함이 맞는 거라고. 화를 내도 된다고. 소리치고 울어도 된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아무 일 없는 듯 외면했던 것을 드러내서 존재하는 것으로 만들고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아이들이 학교 폭력을 당했을 때는 부모에게 그 억울함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못한다. 그런데 부모가 학교에 가서 따지고 선생님들이 공감해 주고 가해 아이들이 사과하고 나서야 그때 느꼈던 억울함과 분노를 분출하기 시작한다. 폭력의 상처가 치유되려면 먼저 폭력이 존재했다는 것을 인정받아야 한다. 그리고 폭력에 대한 분노를 충분히 표출한 후에야 비로소 치유가 시작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드라마는 우리나라 남성들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봉인 해제함으로써 그들이 충분히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이 사회에 치유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뭐니 뭐니 해도 이 드라마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회의 두 마디의 대사다. 이것이 이 드라마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나한테 왜 그랬습니까?”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나도 줄곧 이런 의문을 품고 살았던 적이 있다.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한테 왜 그랬습니까?”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대답이 돌아왔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헛웃음이 나왔다.      


피해 아이도 가해 아이에게 묻는다.

“나한테 왜 그랬어?”

“뭘? 나는 기억 안 나는데...”     

가해 아이에게는 그 상황에서 그럴 수 있는 일이었고 그래서 기억할 만큼 특별한 일도 아니다.

    

이것은 폭력의 피해자와 가해자에 의해 반복되는 문답이다. 피해자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질문이지만 그 질문을 받은 가해자는 어리둥절할 뿐이다. 그럼에도 피해자는 이 질문을 끝끝내 하고야 만다. 그 답을 알아내지 못하면 제대로 일상을 살아갈 수 없을 만큼 자신을 압도하는 물음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 폭력의 본질인지도 모르겠다. 부모의 원수를 갚거나 뭔가를 빼앗으려는 뚜렷한 목적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폭력의 이유는 이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물음이 아니라 대답이다.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는 대답은 폭력이 일어나는 동안 주위의 아무도 말리지 않고 경고하지 않고 벌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따라서 진짜 가해자는 바로 알고도 묵인하고 방관했던 ‘우리들’이라는 의미다. 원작 웹툰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게 끝난다.   

   


이제 당신도 목격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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