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자극이 된 계기에 대해, 팬심 담아 쓴 글
나는 게임, 그 중에서도 리그오브레전드(LOL) 팀 경기를 즐겨본다.
LOL은 5대5 팀게임이다. 내가 게임 경기를 보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야구나 축구를 즐겨보는 것과 비슷하다. 모든 스포츠에는 감동의 순간이 있다. 나에게도 게임 경기를 보다 울컥한 순간이 있었다.
1. 위 사진이 내가 폭풍 감정을 느낀 장면이다. 의자에 앉아 한 사람이 고개를 못들고 있다. 모르시는 분들은 그냥 별거 없네? 라고 생각하실 수 있다. 이 사진은 LOL 최대 규모의 세계대회 결승에서, 당시 최고였던 선수가 석패하고 나서 우는 모습이다. 나는 이 모습이 내 마음에 짙게 남았다.
2. 축구나 농구에 관심 없는 사람도 메시, 마이클 조던은 안다. 스타크래프트에 관심 없는 사람도 이제 임요환은 아시리라 생각된다. 이 사진의 주인공인 페이커는 LOL에서 바로 그런 존재다. LOL이 많이 대중화되기는 했지만,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서 잠시 소개드리고 싶다.
페이커, 본명 이상혁은 1996년생으로 2013년에 LOL 프로로 데뷔했다. 고등학생의 나이로 데뷔해서 그 해 LOL판을 쓸어담는 슈퍼루키이자 로열로더였다. 그러나 그는 2014년 팀 리빌딩을 겪고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LOL 프로게이머들은 국내에서 활약을 못하면 빠르게 은퇴하거나 해외에서 생활을 이어간다. 프로게이머의 수명이 3~5년 정도인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조금 더 페이를 더 받는 중국에서 잠깐 바짝 벌거나, 아니면 빨리 그만두거나.
3. 게이머라는 직업에 대한 안좋은 인식과 짧은 수명에도 불구하고 2014년에 그는 한국에 남았다. 직업 수명을 생각하면 사실상 게이머 인생에 있어 나름의 결단을 내린 셈. 결국 피흘리는 노력으로 2015년, 2016년 다시 재기하여 그의 팀 SKT T1에서 국제, 국내 대회를 휩쓸게 된다. 가장 큰 규모 대회의 상금이 50억 정도임을 생각하면, 그가 금전적으로 거둔 성과와 명예는 엄청났다.
4. 그러나 그의 매력은 그의 실력이 최고이기 뿐만이 아니다. 프로게이머들이 어린나이에 방송에 나오면서, 과거 게임에서의 미성숙한 언행으로 인해 구설수를 빚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e스포츠 팬 연령층 역시 젊다. 승부조작, 인성 문제 등 여러가지 논란이 점화되기 쉬운 구조이다. 페이커는 한 번도 이러한 루머에 시달린 적이 없다. 굴뚝에서 단 한 차례의 연기도 나지 않은 채 오로지 프로라는 마인드로 경기에 임했다.
e스포츠 시장이 커져가고는 있다고 해도, 아직까지 정식 스포츠로 인정받기에는 갈 길이 멀다. 또한 프로 게이머라는 개념이 대중에게는 희박함에도 불구, 그의 인터뷰들을 보면 얼마나 그가 프로의식을 갖추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이를 반영하듯, ESPN에서는 그를 대상으로 프로게이머 최초 인터뷰를 했다)
5. 그러던 2017년 가을, 그가 세계 대회에 참가해서 또 한번 결승에 진출했다. LOL에는 팀원마다 역할, 그리고 역할별로 유행이 있다. 당시는 그가 활약하기에 대단히 안좋은 유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금 팀과 함께 결승에 진출했던 것.
게다가 그의 팀 상황은 좋지 않았다. 새로 영입한 팀원과의 호흡 문제도 있었고, 기존의 팀원들은 우승을 여러번 했기 때문에 팀 전체가 매너리즘에 빠진 듯도 했다. 그럴만도 한 것이, 그의 팀 SKT는 우승해봐야 본전이었다. 이런 이유로 슬럼프에 빠진 팀원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초심을 잃지 않았다.
6. 결국 결승에서 패배. 그의 팀 SKT가 세계 대회에서 다전제(5전 3선승제) 첫 패배를 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많은 트로피를 손에 쥐었으니 편하고 싶을만도 하다. 한번쯤 지더라도 누구도 그에게 돌을 던질 순 없다. 그가 패배한 순간, 모니터에 잡힌 모습이 바로 그가 엎드려 울던 모습이다. 그의 승리에 대한 절박함은 TV를 뚫고 나왔다. 단 한번도 약한 모습 보인적 없던 그가, 처음으로 아쉬움을 토해내는 장면이었다. LOL을 보는 사람이라면 이 장면의 임팩트를 아실 것이다.
7.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정말 울컥했다. 사회적으로 크게 인지도가 높지 않은 프로게이머, 게다가 짧은 계약기간과 수명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프로로서 최선을 다했다. 나보다 어린 그지만 그렇게나 이룬게 많은 그가, 얼마나 간절히 또다시 우승을 바랐는지가 직접적으로 느껴졌다. 그가 간절했던 만큼, 아쉬움이 눈물로 나왔을 것이다.
8. 그리고 나는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당시 나는 진로 고민에 더해서 남들과 비교했을 때 드는 패배감 때문에 무엇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뭔가 있어보이는 삶, 편해보이는 삶, 남들이 인정해주는 삶을 찾아서 노력하고 싶어도 동기부여가 워낙 안되는 나였다. 그건 내가 꿈꾸는 삶은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해서 내가 하고싶은 것에 도전할만한 깡같은게 있지도 않았다. 용기가 없었다. 내 능력에 확신조차 없었다. 이런 내가 뭘할까 싶었다.
그런데 나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상관없이, 무엇이든 저렇게 간절히 원하고 바라며 부딪혀본 적이 있었던지. 있었다면 그게 도대체 언제였던지. 나는 페이커처럼 최고의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에서도 저렇게 달릴 수 있는 사람인지. 내가 선택했거나 선택할 것들에 대해서 절박하고 진지하게 도전하고 있는지. 선택에 따라오는 불안요소를 극복할 생각은 못하고 환경 탓만 하지는 않았는지. 별별 생각이 들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이 선수를 보면서 돌연 부끄러워졌던 것이다.
9. 글 하나에 뭐 프로게이머 한명 이야기를 장황하게 써놨냐며 노잼이라고 하실 수도 있다. 별로 흥미가 없으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최고였으며 그의 열정은 진짜였고, 지금도 진짜이다. 지금 비록 게임에서는 슬럼프지만, 아시안 게임 대표로 시범 종목에 출전한다는 소식을 최근에 들었다. 여전히 그를 보며 자극을 받는다. 그런 그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고 싶냐며 내 마음에 질문을 던졌다. 딱 저 영상 속 눈물 하나로.
10. 나는 저 영상을 보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물론 어떤 스포츠든, 혹은 어떤 이야기든 보고 들으면서 자극 받을 수 있다. 굳이 페이커가 아니라도 내 주변엔 정말 본받을 만한 사람이 많다. 다른 누군가를 멘토삼아 조언을 받을 수도 있다. 그치만, 최고의 자리를 포함한 어떤 환경에서도 그저 프로라는 마인드로 최선을 다하며 만개했던 그의 사진을 나는 지금도 종종 꺼내어본다. 내가 바라며 되고 싶어하는 진짜 프로페셔널을, 나는 만나본적도 없는 저 게이머에게 느끼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