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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오드 Apr 04. 2021

겁내지 않고 그림 그리는 법 (이연 저)

- 그림 유튜버 이연님의 글

<그림이 무섭다는 건, 간단하게 말하자면 스스로에게 기대치가 높다는 의미다. p210>

54만명의 구독자를 이끄는 독보적인 미술 크리에이터 '이연'작가가 쓴 책이다.

유튜브 채널에서 자유로운 드로잉 과정을 찍어 보여주고, 때로는 자신의 나레이션을 담은 어떤 이야기를 함께 전한다. 배경음이나 일상 소음이 소거된 화면 속에서 묵묵히 만년필을 쥔 손은 백지에 선을 그어나간다. 그와함께 나레이션으로 전해지는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백지의 선은 그림이 되어있다.

작가는 어린시절 미술을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고, 특기 란에 피아노를 적고, 장래희망에 피아니스트를 적던 아이였을만큼 꿈에 소극적이었다. 그런 자신이 스스로에게 물었다.

'과연 내가 그림을 그려도 될까?'

어린 마음에도 화가로는 먹고 살기 힘들거라는 막연한 생각과, 좋아하는 것에서 나아가 그에 걸맞는 실력과 명성을 얻는 미래를 확신할 수 없었기에 그녀는 대답을 주저했었다.


그런 그녀가 나(당신)에게 그림을 시작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화가는 상태다. 누구든 그림을 그리면 그때만큼은 화가가 된다. 화가는 대단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기본을 가장 잘 지키는 사람이다. 기본은 무엇일까? 그림을 언어로 생각하고 표현하는 것, 그 행위에 진중함을 담는 것이다. 그림은 언어다. 달리 시각적은 형태를 가졌을 뿐이다. 감정과 생각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목적도 언어와 같다. p28>


그림, 학창시절 '미술'이라는 과목으로 고통을 받던 나에게는 이 설명이 직관적으로 다가왔다. 미술도 영어 공부처럼 접근을 해보면 어떻겠냐는, 단어=소재라는 공식을 대입해서 말이다.


단어를 많이 아는 사람이 언어를 잘 구사하듯 다양한 소재와 그것의 형태력을 아는 사람이 풍부한 표현을 한단다. 나는 사물을 바라보며 그것을 그려낼만큼 꼼꼼하게 관찰했던가? 별로 주의깊게 보지 않았기에 실제로 머릿속에서 끄집어 내 그릴 것도 없었던 것 같다.


<많이 보고 다양하게 생각할 수 있는 이가 창의적인 사람이다. 그러니 틈틈이 소재를 관찰하고 분석해 두자. 사소한 것을 사소하다고 치부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p30>


<그림은 정말 본 만큼만 그릴 수 있다. 그 이상 얻어걸려서 우연히 잘 그려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정말 정직하게 보고 느낀 만큼만 종이에 표현이 된다. 그래서 나는 그림이나 글을 풍부하게 표현하는 사람들을 보면 굉장히 놀란다. 저 사람은 세상을 이 정도의 디테일로 살펴볼 수 있는 사람이구나 싶기 때문이다. p82>


조형예술학 전공자이면서(시각디자인도 복수전공) 미술 크리에이터니까 미술이 편하고 쉬운거겠지. 라는 푸념을 독자로서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책을 읽다보면 그녀를 키운 것의 8할이 열등감이었음을 알게 된다. (세상에 그림 잘그리는 사람 많은데, 굳이 나까지? , 내가 그림을 그려봤자 누가 내그림을 알아준다고.)


<나는 항상 동갑내기 친구들에게 가장 강력한 열등감을 느꼈었다. (중략) 아무도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지만, 그 애가 나보다 잘 그린다는 사실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중략) 훗날 고등학생이 되어 얼추 따라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걸 너무도 일찍이 깨달은 그 애가 조금 미웠다. p51, 52>


열등감이라는 상자를 열어볼 수 있다면, 그 안에는 바로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이 들어 있음을 알게 된다고 말해준다. <열등감은 분명 괴로운 감정이다.(중략) 그럼에도 그 안에는 에너지원이 있다. 정말 그렇다. p55>


그렇다면 열등감까지 끌어안고 성장 동력으로 삼은 우리는 '무엇을 그려야할까?'

<뭐든 그려내어 여러 종이를 낭비해 보는 것, 이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p70

잘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잘 보는 사람이 그만의 창작을 한다. p80>


일단은 생각나는대로 그려볼 것, 흰 여백을 두려워하지 않고 선을 그어볼 것, 그리고 관찰은 의외로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중요한 자세다. 매일 밤, 첫째 아이가 독후활동의 일종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자를 몇자 끼적이는 과제를 한다. 아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살펴보면 아주 거침이 없다. 선을 주-욱 그어서 형태를 만들어낼 때 옆에 앉아 속으로 감탄한다. 나는 점점 무언가를 하는게 어렵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본 다음에야 펜을 든다. 혹은 컴퓨터 앞에 앉는다. 조심스러운 태도가 앞서는 순간이 많아진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흰종이를 낭비할까봐 겁난다. 그래서 새 노트도 뒤에서부터 쓰게 된다.


24년간 그림을 그려 온 작가가 친절하게 방법을 알려준다. 본인 역시 겁이 많기 때문에 나(독자)의 마음도 잘 안다고 말하면서,


1. 겁이 날 때, 그때야말로 그림을 그려야 하는 가장 좋은 때다
<만약 가슴 안에서 '나는 그림에 재능이 없는 걸'이라는 음성이 들려온다면 반드시 그림을 그려보아야 한다.그 소리는 당신이 그림을 그릴 때 잠잠해진다. - 빈센트 반고흐 <반고흐, 영혼이 편지> 중>

2. 종이에 아무 선이나 긋고 시작한다
<아무거나 긋고 시작하면 그 위에 그리는 선들에는 부담이 없다. 그리고 뒷장부터 그리는 건 정말 별거 아닌데, 생각보다 효과적이다.>


3. 쉬운 것부터 그린다
<가장 큰 개체, 긴 선, 눈에 띄는 색, 내가 좋아하는 대상, 비어 있는 공간.>

4. 지우개를 쓰지 않는다
<그림에 진도가 안 나간다.(방금 그은 선에 집착) 종이가 망가진다 > 결국 그림이 더 산으로 간다>

5. 지우개를 쓴다
<인생은 시간을 돌릴 수 없지만, 그림에는 지우개가 있잖아.(중략)나에게는 언제든 이 그림을 지울 수 있다는 결정권이 있고, 내가 내 그림의 유일한 창조자라는 사실 또한 흠뻑 느낄 수 있다.>

앞선 5가지는 실제 그림을 그리기 위한 방법을 제안한 것이라면 나머지는 그리기에 대한 생각과 태도에 관한 것인데, 보정할 수 있다는 여유, 망치는게 두렵지 않다는 세뇌, 망치더라도 혼자 간직하면 그만이라는 배포, 그리고 붓을 들었다면 완성할 것, 그리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처음이라는 깨달음을 갖고 그림을 그려볼 것을 적극 권장한다.


사실은 이 책은 유명한 미술 크리에이터가 '그림 잘그리는 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생을 살아가며 한 번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 거창하게 말하면 꿈을 어떻게 끌어안고 나아갈 것인가와 더 가깝다.

<이 책이 그림을 그리는 이야기만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당신이 진작에 눈치챘기를 바란다. p118>

금수저로 태어나지 않은 이상, 예술전공은 집안의 재정적 지원과 타고난 재능이 굳건히 따라주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부모님이 투자한 교육비가 아까워 유튜브를 시작했다는 작가의 설명과는 달리, 책 전반을 지배하는 작가의 높은 자존감과 자기애, 자기 인식 등이 그녀의 유튜브 채널에 고스란히 반영되었고, 그러한 매력이 구독자를 이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완독한 후, 그녀가 설명한 채널이 궁금해 찾아보았다. 100여개가 넘는 영상을 2년간 업로드한 그녀의 부지런함이 엿보였다. 그녀 채널이 갖고 있는 특성은 무엇이 될지도 모르는 여백을 하염없이 쳐다보게 된다는 것이었다. 정말 그랬다. 그림 그리는 작가님의 손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어느순간부터는 그림그리는 소리만이 존재하던 영상에서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나레이션으로 더했다. 그림과는 무관한 작가님의 이야기가 들려오는 영상은 확장된 책처럼 느껴졌다. 책 속의 화자가 직접 발화하는 것을 들으니 색달랐다. 많은 미술영역의 크리에이터가 있을지라도 그녀의 방식은 유일무이한 체험이다. 그녀의 또렷한 주관이 평화로운 드로잉과 함께 전해져온다.



Title. Photo by Rifqi Ali Ridho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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