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오드 Nov 19. 2021

그는 나를 몰래 찍었다

범인을 검거했다

1주일하고 이틀이 더 지나갔다.


하루는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가, 하루는 다시 얼굴이 흐려진다. 내가 잘 못 보았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내려다 본 엉거주춤한 내 모습을 떠올린다. 다시 그 남자를 향해 소리지르던 내가 겹쳐지며 어떤 행동을 즉각적으로 취하지 않음을 후회한다.


나는 반각성상태였다. 잠이 오지도, 식욕이 당기지도 않았다. 이건 마치 여자들의 그날 직전의 상태가 이어지는 것과 같다. 계속 정신이 깨어있다. 몸 구석구석 세포들에 불이 들어온 듯 푹 잠들수 없다.


심리상담을 다녀왔다. 거기서 받은 위안은 더오드님 말고도 이런 일을 겪으신 분이 생각보다 많아요. 심지어 남자화장실에 남자가 숨어서 비슷한 사건이 벌어진 일도 비일비재하답니다. 그러나 그건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남편에게 말해봤냐고? (상담가가 물었다)

그래, 남편은 유감은 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무너지는 일상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저녁모임이 끝나고 헤어질 때 여자들은 자기들이 탄 택시 번호를 공유한다. 남자라면 어떨까. 남자가 저녁시간 헤어지는 지인과 택시번호를 교환하는 경험이 있을까?


어제는 가방 속에 있던 폰이 꺼진 것을 확인하지 못하고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부재중 몇 통이 들어와 있다. 여성청소년팀 K수사관님에게 신호가 간다.


저 1호선 -역 신고잡니다.

예예 알고 있습니다. 용의자 검거했습니다. 용의자가 불법촬영을 했네요.

(...) ... 네, 진술서는? 썼는데요. 진술조서요? 네 알겠습니다. 그날 뵙겠습니다.


과연 경찰은 얼마나 적극적으로 수사에 나설까?

CCTV는 공개를 못한다고?

과학수사대가 다녀갔는데, 그 사이 다른 이용자들이 두 번째 칸을 들락거렸으면?

지문이 안나오면 어떤 단서도 없는건가?

CCTV추적 결과 IC로 빠지는 길 마지막 화면이 끝이라고?


라는 그간의 모든 걱정거리가 한 순간에 착 가라앉으며, 이제는 그 눈을, 그 얼굴을 다시 본다는 생각에 다시 심장이 죄여왔다. 겨드랑이에 땀이 나고, 마음이 꽉 조이는 듯 했다. 심리상담센터에서 24일날 전문의선생님과의 면담을 준비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너무 멀었다. 당장 긴장감이 올라갔다. 구글맵에서 가장 가까운 정신건강의학과를 검색해 급히 가방을 들고 나섰다.


불안도와 우울감이 상당히 높네요.


새끼 손톱만한 알약이 하나. 노란 정방형 알약이 반개. 지금 내가 느끼는 불안을 잡아 줄 유일한 방법을 받고선 집으로 돌아가려니 그것도 두려웠다. 조용한 공간에 앉아 있으면 계속해 머리는 그날을 복기한다. 병원 옆의 사람이 많은 카페로 들어갔다.


범인을 잡기 전에는 정말 잡을 수 있을까? 그냥 이건 흔한, 그저 재수가 없었던 화장실 침입 사건으로 묻혀 버리는 걸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면.


범인 검거는 또 다른 불안을 불러왔다. 만약 그가 인근 거주자라면? 19세는 성년인 19일까, 아님 어제 수능을 본 친구들 처럼 성년 전 19일까. 선처를 바라지 않지만 이 처벌은 그의 인생에 어떤 변화를 불러올까. 등 내가 고려할 필요도 없는 가해자의 모든 것들이 수면으로 떠올랐다.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때>를 읽으며 내가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전혀 몰랐던 디지털 성범죄, n번방 텔레그램을 악용한 성범죄들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들은 실시간 스트리밍을 이용해 아동청소년 불법 성착취동영상을 전송했고, 상위방으로 갈수록 더욱 레어한 영상과 소위 연예인 사진이라는 영상과 사진들을 공유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그럼 여기서 대체 그방에서 나를 찍은 불법촬영물은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화장실 여자 엉덩이 몰카는 그 방에서 계급장이나 다름 없었다. 운영자에 의해 상위방으로 올라가는 (그들만의)영광을 얻으려면 몰카(몰래카메라), 길에서 찍은 여성들의 뒷태, 지인사진(지인능욕이란 명목하에 합성과 재수정을 거쳐 대화방의 가십거리가 된다) 등이 필요하다. 물론 나를 촬영한 불법영상물도 그런 익명의 sns상에서 떠돌고 떠돌고 있으리라.


추적단불꽃은 기존의 언론이 주목하지 않던 불법촬영, sns상에서 일어나는 디지털 성범죄에 주목하며 추적탐사하여 보도했다. 추적단불꽃이 쏘아 올린 불씨는 제대로 뇌관을 터트리며 이 방을 만들었던 최초 개설자들(고작 20대에서, 10대들이었다)은 모두 구속되어 각각 42년형, 35년형, 15년형을 구형받았다.


추적단불꽃님들에게 물었다. 저는 성범죄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범인을 검거했다고 연락을 받았는데, 저는 이상황에서 무엇을 해야할까요. 불꽃님들은 


1. 대한법률구조공단에서 법적인 자문을 구할 수 있고

2. 관련 심리상담을 받을 수 있는 국가여성센터들을 안내해주셨고

3. 경찰청 출두 시 꼭 변호사를 대동하라는 조언을 건넸다. (성범죄는 형법에 속하는 범죄다)


1주일간 자주 분노했고, 한숨을 내쉬었고, 또 후회했다. 결국 억울한 건 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무너지는 듯 했다. 그러나 오늘 아침의 연락은 하나의 희망을 비추어주었고, 결코 앉아서 당하고 있지만은 않겠다는 다짐을 더욱 굳건하게 했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영원히 어리지 않다. 강력한 여성으로 변해 당신의 세계를 박살 내러 돌아온다." p96,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 이봄 2020



Photo by Dan Gold on Unsplash

작가의 이전글 화장실 옆칸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눈과 마주쳤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