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 중간에 수사관님과 통화할 때는 가해자의 마지막 동선까지 확인한 상태였고, 그 이후에 검거연락을 받았다. 실제 수사관님께 배정된 사건은 수십건이상이며, 내가 연루된 범죄사건에만 시간을 할애할 수 없다는 것을 몇 번의 수사관과의 통화, 변호사의 법률상담을 받아가며 알게 되었다. (*또 하나 알게된 것은 나의 사건 담당 수사관과 현장에서 용의자 검거를 위해 수사하러 다니는 경찰관은 다른 분이었다. 그러니까 나의 사건에 대한 배정과 기록을 하는이, 현장에서 용의자 동선과 신원을 파악하러 다니는 이, 다른 2분이었다는 것을 몇 번의 전화통화로 알게 되었다. 미디어에서 보았던 수사관들과 현실은 매우 달랐다.)
최종 검거되었다는 소식에 직접적으로 묻진 않았지만, 범죄 사건 익일 오전에 현장에 다녀간 과학수사대 팀의 유전자 감식이 가장 큰 역할을 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문, 유전자 어느것 하나만 잡혀도 주민등록번호를 쓰는 한국에서 신원파악은 끝 아닌가. (지구대 신고, 사건번호배정, 그러고나면 절차적으로 진행이 되니, 절대적으로 필요한건 *초기 112신고입니다)
사건 당일 현장에서 쓴 진술서는 아주 기본적인 문서에 지나지 않았고(지구대>관할경찰서로 사건 배정을 요청하는 정도의 서류), 가해자를 수사하기 위해서는 본격적으로 피해자인 내가 담당수사관과 함께 조서를 쓰는 절차가 선행되어야 했다.
우스갯소리로 탐정물을 보면 '조서는 꾸미기 나름'이라는 말들을 한다. 이 조서를 바탕으로 피의자 조사가 들어가는데, 과연 피해자인 나는 어떻게 진술을 해야하는가. 일단은 n번방 성범죄를 탐사보도했던 '추적단불꽃'님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추적단님들의 조언을 바탕으로, 먼저 돌아오는 월요일 '대한법률구조공단'의 화상법률상담을 신청했다.
오전 10시에 담당자분과 상담을 했고 (관할지역 법률공단에 방문할 수도 있으나, 광역시의 경우 2주간의 예약은 꽉 차 있었고, 화상상담은 타지역에서 예약을 받아주었다. 나는 '함안지소'에 근무하시는 법률자문 공무원분과 상담을 할 수 있었다.)
여기서 '성폭력 범죄 피해자 조력인'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내가 신청할 수 있는 국선변호인 제도에 대해서 안내를 받았다. 성폭력 범죄 피해자의 경우 담당 수사관에게 요청하면 '국선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다.(국선변호인 배정은 00지검 (검찰청) 피해자 지원실에서 한다) 국선변호인을 동석한 상태에서 조서를 쓸 수 있기에 법률적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담당 수사관에게 이러한 의견을 전달했고, 그러면 성폭력범죄사건의 경우에는 지역의 '해바라기 센터'에서 여성경찰관과 국선변호인 입회하에 조서를 쓰면 된다고 했다.
피해자 조력인 제도의 경우에는 좁게는 법적인 지원을 위해 국선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다는 것이고, 넓게는 심리적 지원까지 가능한 조력자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까지 포함된다.
*피해자 국선변호사 제도> 성폭력 피해자 및 그 법정 대리인은 형사절차상 입을 수 있는 피해를 방어하고 법률적 조력을 보장하기 위해서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다.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 27조 제1항.
해바라기 센터는 보통 지역의 대학병원, 지역 시립병원내에 위치하며 여성가족부 산하기관으로 운영된다. 여기서는 성폭력, 가정폭력, 성매매 피해자와 그 가족을 대상으로 상담지원, 의료지원, 법률 수사지원, 심리치료등을 통합적으로 지원하고, 성폭력 피해자의 경우에는 증거물 채취까지 원스톱으로 가능하다. 365일 24시간 현장에서 바로 법적효력이 있는 진술조서를 쓸 수 있고(여성경찰관이 근무), 2차 피해를 방지할 수 있는 지원 서비스를 요청할 수 있다.
조서를 쓸 때 아무래도 담당수사관은 현장에 출동했던 이가 아니며, 나의 구술을 근거로 상황을 파악하고 정리해 문서로 쓰기 때문에, 반복적인 질문이나,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지를 물을 수 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는 떠올리기 싫은 그 날의 기억을 다시 끄집어 내야 하고 마주해야하는데, 이것이 범죄유형에 따라 수치심이 올라오기도 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된다.
그날 현장에서는 얼른 빨리 이 상황을 수습하고 귀가를 하고 싶었기 때문에 출동한 지구대 경위분들 앞에서도 슥슥 자필로 적어나갔지만, 막상 또 그날의 일을 남자 수사관 앞에서 설명해야한다 생각하니 그것 또한 괴로웠다. 그래서 여성경찰관과 조서를 쓰게 되었다.
조서를 쓰면서 좀 더 세밀하게 물어본다. 그것은 피해자의 진술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원래 그렇게 진행한다고 했다. 결국에는 내가 떠나고 나면 남을 조서 한 장. 이것이 나의 피해사실에 대한 사실 바탕이 될 것이기에 최대한 있는 그대로의 현장 상황을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지역커뮤니티에 사건 당일 두서없이 올린 글을 보고 법률적인 조언을 담은 쪽지를 받았다. 성범죄 변호사 선임관련해 전화상담도 가능하니 한 번 자문을 구해보라고. 발신자는 자신이 만났던 변호사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D변호사와 상담을 하면서, 실제로 이런 사건의 초범인 경우에는 실형이 나오기는 어렵다고(세상에는 더욱더 단죄를 받아야할 악랄한 범죄가 많지만, 이는 그에 '비하면' 낮은 수위), 그렇지만 피해자로서 할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한 조언으로 탄원서(철저한 조사를 위한>경찰/ 엄벌탄원서>검찰), 드러나지 않아 가늠할 수 없는 정신적 피해부분에 대한 것은 치료 받고 있는 병원의 서류를 함께 제출하면 좋을 것이라는 의견을 전해들었다.
모든 절차가 지나고, 국선변호사로 오신 J변호사님께서는 성범죄의 경우에는 재발률이 매우 높은 범죄이며, 사실상 잘 재사회화가 가장 안되는 범죄임을 설명해주셨다. 증거물로 수집한 핸드폰의 경우에는 압수되기에 다시 돌려주는 법이 거의 없고, 사실상 어떤 성범죄가 가중한 처벌을 받는지에 대한 설명도 해주셨다.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는 성추행, 스토킹, 마약이나 약물을 이용해 여성에게 위해를 가하는 경우는 처벌 수위가 높다고.
설령, 법은 모든 범죄에 대한 처벌과 실형선고를 위해 도표화하듯이 다룰지는 모르겠으나, 피해자 당사자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하다. 옆 칸에 숨어서 몰래 지켜보는 것은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려는 의도는 없는 것으로(법적인 판단을 내리는 입장에서는) 보일지라도, 이 사건이 2016년 강남역 인근 남녀공용화장실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이 되지 않으라는 확신을 할 수도 없다.
초범으로 잡히기 전에도 이미 많은 피해자가 있었을 것이므로, 첫 번째와 두 번째 체포, 두 번째와 세 번째 체포 사이에도 분명 피해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최초 체포 당시 범죄에 상응하는 처벌을 내렸다면 피해를 보지 않았을 여성들이다. 초범은 실형을 살지 않는 암묵적인 관행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p142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는 말은 가해자에게만 통한다. 피해자는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하고, 때에 따라서는 몇 년이 지나도 기억이 되살아나 고통에 시달린다. 생활에 지장이 생기거나 불면증에 시달리고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등 성추행을 당한 기억이 미치는 영향은 막대해서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p158
고바야시 미카도 피해자의 가해자에 대한 감정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죽어도 용서할 수 없는 피해자의 마음을 가해자는 평생 짊어지고 살기를 바란다. 반성문이나 사죄문은 의미가 없다. 그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p1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