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돌도 있어요
삶이 깜깜하던 시기에 문득 내 사주가 궁금했다. 현재는 답답했고, 미래는 막막했으며, 삶은 마치 엉켜있는 실타래 같았다. 엉킨 내 인생을 한번 풀이해보고 싶었다. '풀이'의 사전적 뜻이, 모르거나 어려운 일을 알기 쉽게 밝히어 말하는 일이던데, 깜깜한 내 인생이 왜 이렇게 되었고, 어디로 흘러갈지 누군가 말해줬으면 싶었다. 그런데 타자가 내 인생을 풀이해주는 거 말고, 내가 나를 풀어내고 싶었다. 동양의 사주명리학이든, 서양의 심리학이든, 다양한 방법과 관점으로 나를 알아가고 싶었다. 심리학 전공자가 사주명리학을 독학한다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학문의 경계를 두지 않고, 나를 알고 싶었다. 독학이라 깊이는 매우 얕지만, 나를 알아가는 도구로는 충분한 쓰임이 있었다.
사주에서 물상(物象)이라는 용어를 쓰는데, 사주의 여덟 글자를 자연, 사물, 풍경 등으로 비유하여 해석하는 방식이다. 시각적으로 이미지화하여 나라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어서 매우 신박한 접근이었다. 여덟 글자를 봤을 때 나의 물상 이미지는 '달빛 하나 없는 적막한 겨울 밤바다'였다. 달빛도, 파도도 하나 없이, 그저 숨막힐 듯이 고요하고 깜깜한 바다였다. 망망대해는 끝이 보이지 않아 막막하지만, 크나큰 잠재성도 내포하고 있다고 하던데, 나에게는 잠재성과 가능성 같은 건 보이지 않는 그저 깜깜하고 막막한 겨울 바다였다.
그런데 또 한번 아이러니하게도, 물상 이미지를 떠올렸을 때, 나는 그냥 있는 그대로 나를 이해해 버렸다. 저절로 이해가 됐다. '아 그랬구나. 달빛 하나 없이 숨막힐 듯 고요한 바다니까. 그래서 삶이 깜깜하다고 느꼈구나'. 그간 나는 내가 어떠한 잘못된 선택과 결정을 하여 현재 상황에 이르렀을지 많이 곱씹어 보았다. 곱씹다보면, 아쉬움과 후회, 자책과 부끄러움이 따라왔다. 그러다 마음이 훅 가라앉아버리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태어난 연월일시에 펼쳐진 풍경이 적막한 겨울 밤바다라니, 이건 내가 뭔가 잘못된 선택과 결정을 해서 현재의 시련이 있다기보다는, 그냥 그렇게 태어난 거였구나 싶었다. 내가 갖고 태어난 기운이 그러했다고 생각하니, 내 탓도, 남 탓도 필요 없었고, 현실이 받아들여졌다. 심리학의 관점에서 잘 되지 않던 자기수용이 사주명리학의 관점을 통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사주를 통해 미래를 점쳐보려는 경우도 많이 있겠지만, 나는 과거와 현재에 대한 이해 없는 미래 예측은 의미가 많이 퇴색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막막한 현실이 언제쯤 끝이 나서 터널 끝, 희망 시작일지 궁금한 마음은 분명 있었다. 하지만 사주를 통해 내가 얻은 귀한 것은 자기이해와 자기수용이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적막함과 고요함은 자연스러운 것이자, 나의 일부임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받아들였다하여 갑자기 어둠이 걷히고 밝은 빛만이 내 인생에 가득했던 건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과거에 어떠한 선택이 잘못되었는지 샅샅이 뒤져 강도 높게 나를 비난하고, 다시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라며 내가 나를 다그치는 일은 현저하게 줄었다. 대신 과거의 선택에 어떠한 이유가 있었을지 나의 이야기를 들어보려하고, 무엇이 나에게 중요한 가치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비난과 다그침이 내 마음에 가득했을 때 나는 마치 낯선 도시 속에 덩그러니 혼자 서있는 이방인 같았지만, 이해와 수용이 조금씩 자리하게 되자 이방인으로 느꼈던 고독감은 조금씩 희미해졌다. 아직도 연습 중이지만, 이 연습은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을 쓰려고 챗GPT에게 나의 사주 물상에 대해 물어보자, 챗GPT는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역시 독학의 한계인가. 쿨럭. 챗GPT가 말하기를, 나의 사주 물상은 마음대로 흘러가는 거친 바다가 아니라, 고요한 물줄기를 유지하면서도 자신만의 흐름을 만들어가는 냇가라고 했다. 누군가를 삼키는 바다가 아니라, 깊고 잔잔하게 사람과 삶을 적시는 흐름이 있다고 했다. 비록 달빛이 없어 깜깜할 순 있지만, 냇가 옆에 단단한 은빛 돌이 하나 자리잡고 있다고도 했다. 바다라면 돌이 보이지 않겠지만, 냇가니까 돌이 보이는 거라고 했다. 수(水)기운이 강해 흐름에 휩쓸릴 때도 있지만, 그걸 붙잡아주는 중심점이 되는 단단한 돌이 있음을 내가 간과했다고 말했다. 무한정 확장되거나 침식되는 느낌이 아니라, 흐르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구조가 내포되어있다고 했다. 그러니 자신을 믿어보라고 했다.
살다보면 냇가가 다시 바다로 느껴질 때도 있을 거고, 또 다시 침잠하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제는 내 탓과 남 탓 대신,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려 한다. 조용하지만 깊고 잔잔한 내 안의 흐름을 믿으며 그 시간이 지나가길 차분히 기다려보려 한다. 그 믿음이 나를 더 이상 고독한 이방인으로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