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일 하나씩 말해 보는 건 어때요?
누군가의 생뚱맞은 제안에 모두가 아이들처럼 웃었다. 이야기에 목말라 있던 참이었다.
“그럼, 제가 먼저 말해 볼까요? 얘기가 좀 길어요.”
나도 모르게 잔을 채우라고 손짓을 했다.
“20년 전 일입니다. 대학원 수업을 마치고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회비를 내려고 지갑을 찾으니 아무리 뒤져도 없는 겁니다. 붉고 길쭉한 데다 제법 커서, 바닥에 흘렸으면 금새 알아챘을 텐데.”
“얼마나 잃어버리셨어요?” 누군가 묻자 나는 씁쓸히 웃었다.
“10만원입니다. 큰돈이었죠. 조교 월급이 쥐꼬리만 할 때라. 그날따라 점집을 예약해 뒀던 터라, 가서 물어보자 싶었죠.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거든요.”
점집에 들어서자, 대문 안에 큰 개 다섯 마리가 지키고 있었고 허리가 90도로 굽은 할머니가 마루에 앉아 있었다. 달려드는 개들에게 “시끄러!” 한마디 던지고 방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생년월일을 묻지도 않았다. 성냥개비로 탑을 쌓다가 한 마디씩 해주는 곳이었다.
집은 낡았고, 할머니 모습은 보통 사람 같지 않아 긴장이 됐다. 질문을 못하게 해서 그저 숨 죽인 채 기다릴 뿐이었다. 한참이 지나자 할머니가 물었다. “뭐 잃어버린 거 없냐?” 고개를 끄덕이자 “미련 버려라. 그리고 잃어버린 것에 대해선 입도 떼지 마라.” 당부했다.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그냥 아무 말 말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곧 알게 돼.”
그날 이후, 나는 이상한 꿈을 꿨다. 무단횡단을 하다 경찰 두 명에게 붙잡힌 것이다. 유독 우락부락하게 생긴 경찰이 신분증을 달라고 했다. 지갑을 잃어버린 터라 없다고 했다. 사실이었으니까. 기연시 이름을 대라고 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는데, 경찰이 받아 적은 글자 하나가 틀렸다. 잘 됐다 싶어 부리나케 달아났다. 꿈이었지만, 깨고 나서도 아찔했다.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사람들은 내 앞으로 의자를 바짝 당겼다.
그 무렵 나는 현대자동차에 근무하는 독일인 엔지니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우베라는 사람이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리는 김치 박람회를 가고 싶어 했다. 마침 그날 단거리 자동차 경주가 한창이었다.
구경꾼들이 넘어오지 못하게 큰 드럼통들이 세워져 있었다. 나는 그 옆을 걸으면서 구경했다. 한 멋진 레이서가 드럼통에 몸을 기댄 채 쉬고 있었고, 곁에는 보닛을 활짝 열어둔 경주차가 엔진을 식히고 있었다. 나는 잠시 그 옆에 서 있었다. 우베가 엔진을 설명해주고 싶다며 나를 불렀다. 바로 그때였다.
쾅-. 드럼통이 부딪치는 소리가 땅을 울렸다. 고개를 돌린 순간, 그 레이서가 공중으로 솟구쳤다가 바닥에 털썩 떨어졌다. 그는 즉사했다. 신문에 크게 실린 사건이 되었다. 불과 몇 발자국 앞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몸이 굳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우베가 급히 나를 끌어내지 않았다면 여전히 그 자리에 얼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모두 깜짝 놀라 미소가 사라졌다.
“그런 일이… 믿기지 않네요.” 내 바로 앞에 있던 P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점집 할머니 말을 이해하게 됐죠. 그 뒤로 웬만한 일에 화가 나지 않습니다. 이보다 나쁜 일은 있을 수 없을 테니까요.”
나는 조용히 잔을 비웠다.
가끔 생각한다. 혹시 그 기억이 나를 길로 불러낸 건 아닐까. 걷고 또 걷는 일. 결국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