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의 여름은 대체적으로 쾌적했다. 예고도 없이 이슬비나 소나기가 내려 변덕을 부리긴 했지만, 금세 그쳤다. 하루 머물기로 찾아간 호스텔에는 나와 미국에서 온 M 뿐이었다. 1층에는 여행자들이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온 잘생긴 P, 몸집이 아주 큰, 스위스에서 온 남자 A가 있었다.
프랑스어, 독일어 그리고 영어가 탁구공처럼 튀며 공기를 채웠다. 내가 좋아하는 언어들이었다. 그들과 프라하에 함께 있다는 사실이 감탄스러웠다.
나와 비슷한 체구를 가진 M은 한국에 5년 정도 머물다가 다시 여행 중이라고 했다. 한국어도 제법 알아 들었고, 통하는 게 많았다. 모두 배낭을 메고 돌아다니는 여행자들이었고, 서로의 안부를 별일 아닌 듯 주고 받았다.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던 피아노를 가리키며 A가 물었다.
“피아노 칠 수 있는 사람?”
“잠깐 기다려 봐.” M이 자리를 떴다.
그 사이에 P가 주머니에서 하모니카를 꺼냈고, 어느새 M이 우쿨렐레를 가져왔다. 분명 방에서 보지 못했는데 배낭뒤에 숨겨져 있었던 모양이다. 모두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M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Somewhere over the rainbow’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흥미로워하던 A가 피아노에 앉았고, 호스텔 주인아저씨도 눈빛으로 연주를 허락했다.
프라하에서 하와이의 무지개가 뜨는 순간이었다.
“너는?”
M이 함께 하자고 눈짓했다. 노래를 따라 부르다 말고, 나는 작은 배낭에서 클라리넷을 꺼내 조립했다. 모두가 호기심 가득 찬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가 연주할 수 있는 유일한 곡,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2악장을 들려줄 순간이었다. 그들 모두를 프라하에서 아프리카로 데려갈 심산이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소리에 반해 배워 둔 것이었다. 배낭에 꽂고 다니면서 언제든 여행자들과 나누고 싶은 배낭 속 낭만이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마우스피스가 없었다. 어딘가에 빠뜨린 모양이었다. 모두가 아쉬워할 때 나의 눈은 조용히 젖고 있었다.
“띠링띠링띠리링”
자전거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나는 실제로 울고 있었다.
모두 꿈이었다.
무지개도, 마우스피스를 꺼내던 순간도.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철새들이 모여 만든 넙적한 길 위로 경비행기 하나가 가로질러 날아가고, 그 위로 클라리넷 선율이 흘렀던 장면. 그 순간이 나를 움직여서 J 선생님을 찾아 갔었다. 그날, 선생님 소개로 야마하 매장에서 검고 날씬한 클라리넷을 샀다.
개인 레슨을 받으면서 2개월쯤 지났을까.
“공명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은데.”
“가망이 있나요?”
“앙상블 팀 만들면 들어오셔도 되겠어요.”
내심 기분은 좋았지만 앙상블엔 관심이 없었다. 딱 한 곡. 모차르트 협주곡 2악장만 연주할 수 있으면 됐다. 그 말은 선뜻 꺼낼 수 없었다. 영어 강사인 나는 “문법 필요 없고, 그냥 말만 잘할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이 한심했으니까.
3개월 들어서면서 J 선생님은 점점 신이 나 있었다. 드디어 내가 음을 내고 리듬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며.
일명, 텅잉(Tonguing). 마우스피스에 끼운 리드 끝 근처에 혀로 가볍게 대었다 떼는 동작을 반복하는 기법이었다. 이걸 반복하면 음마다 혀가 ‘톡톡’ 건드리는 느낌이 난다고 했다. 나에게는 혀를 날름거리는 뱀처럼 느껴졌다. 가뜩이나 말로 수업하는 일상도 벅찬데, 레슨을 받고 돌아오는 길은 두 배로 피곤했다.
피아노는 어릴 적 왼손 새끼손가락이 짧다는 이유로 도망쳤고, 드럼은 배낭에 넣을 수 없는 크기였다. 클라리넷은 사무라이가 칼을 뽑듯 언제든 꺼내어 연주할 수 있는 악기였다.
악기 하나쯤, 아니 딱 한 곡만 연주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나의 오랜 소망. 여행자들과 나누고 싶은 낭만이자, 배낭에 간지 나게 꽂고 싶은 마음이었다.
“선생님, 저는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아쉽군요. 인재를 하나 잃는 기분입니다.”
선생님이 웃으니 나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클라리넷은 결국 팔았다. 연주는커녕, 꿈처럼 여행지에서 꺼내지도 못했지만 그 악기와 오고 가는 시간은 쾌 그럴싸했다. 꿈속 프라하에는 마우스피스가 없었고, 현실에서는 그 낭만을 넣을 자리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아직도, 클라리넷을 배낭에 꽂고 걷는 나를 상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