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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연히 Aug 07. 2020

달이 지면 해가 뜨고

당신을 사랑하기 전엔 몰랐던 세상

 밤공기가 포근했다. 얇은 카디건을 걸치고 나오니 봄이 실감 났다.

 봄내음으로 치장한 나무를 한껏 들이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행위를 준비했다. 오늘의 장소는 아무도 없는 아파트 앞 벤치였다. 먼저 소리 없이 자리에 앉고서 휴대폰은 주머니에 넣어두고는 멍 때리기를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살고 싶어 아등바등하던 때가 있었냐는 듯이, 모르는 척, 가로등 불빛 하나에 내 모든 것을 의지하며.

 

 하루 중 유일하게 붙잡고 싶지 않은 시간이었다.

 일어난 순간부터 잠드는 순간까지 시간이 흐르는 게 그렇게 아깝더니, 이렇게 가만히 앉아있는 건 괜찮았다. 그 시간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계속해서 흐를 테지만 나의 시계는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한 밤에 나만이 깨어있는 것. 그건 밝은 대낮,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목각인형처럼 뻣뻣하던 내가 살아 숨 쉰다는 기분을 만끽하게 했다. 굳이 손과 발을 써가는 행동을 할 필요가 없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만 보아도. 충분히 나는 살아있었다.


 밤이 기다려졌다. 모두가 잠든 이 허공에서 나 혼자 또렷한 정신으로 사색에 잠겼으면 했다. 각자가 맡은 바를 책임지기 위해 달리는 사람들이 그득한 낮에 했다면 비웃음 당했을 내 고민과 생각을 마음껏 하고 싶었다. 나는 왜 그럴까. 더 이상 자책하기 싫었다.

  해가 지날수록 밤을 사랑하는 마음은 더 깊어졌다. 이젠 밤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낮에는 그저 그렇게 일하는 목각인형이 되어 살다가 밤이 되면 책을 읽고, 일기를 썼다. 아침에는 조명 없이 밝은 방이 싫어서 거울 없이 출근 준비를 했다. 환한 빛 속에서 내 모습은 내가 생각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점차 어둠이 익숙해져 버려 나는 그림자가 되었다. 나쁘지 않았다. 눈을 꽉 감고만 있으면, 밤은 저절로 찾아왔다.



 

 그렇게 눈을 꽉 감고 있던 어느 날, 밤 대신 내 편이 다가왔다.


 내 편은 나무를 만지는 사람이었다. 해가 떠있는 시간이 곧 일하는 시간일 때가 많았다. 아침 7시면 일어나 작업실로 출근하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와 쉬다가 밤 10시면 눈이 슬슬 감긴다고 했다. 내 편이 잠든다는 연락이 오면 나는 스탠드 등을 켜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봄에 만난 우리는 낮에 짬을 내 만나고, 여름에는 밤에 맥주 한 캔을 건배하며 야식을 먹기도 하며, 가을에는 낮에 만나 새벽까지 서로를 안은 채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겨울에는 하루 세끼를 함께하는 날들이 가득했다. 한 번도 쉬어본 적 없는 내가 내 편을 만나는 사계절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쉬는 법을 서서히 배워갔다.

 

 완벽하진 않았다. 어떤 날은 일하는 내 편을 관찰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그의 연락만을 기다리면서 어영부영 보냈다. 다른 날엔 나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만 늘어놓기도 하고, 또 다른 날에는 하루가 허무하게 지나가는 것 같은 두려움에 밤새도록 운 적도 있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일을 한다는 것에 안주하는 내 자존감 하나가 떨어졌으니, 밤에 사색하는 내가 사랑스러워질 리가 없었다.


 혼자 방황하는 와중에도 내 편은 끊임없이 하고자 하는 일을 끝까지 해내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나는 어떻게든 꿈을 다시 되찾아오고 싶었고. 이 두 가지가 합쳐지니 나에게도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글을 쓰겠다는 꿈을 펼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고, 그 시간은 밤만으로는 부족했다. 나의 집중력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고, 머릿속으로만 떠올리던 모든 것들을 내 언어로 내뱉기까지가 너무 오래 걸렸다. 거기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까지 고려해봤을 때, 절대 밤에만 살아있을 수 없었다. 나는 부지런해야 했다.

 

 해가 뜨면 자연스럽게 글을 써 내려갔다. 조명 하나 없이 환한 방에서. 지난 몇 년간의 나, 어둠이 내렸을 때만 공상에 빠져있던 나는 결국 자신이 없었을 뿐이었다. 어둠이 걷히고 나타나는 나를 당당히 소개할 수 없었다. 내가 작아지는 모습을 보기 싫어서 낮에 보이는 아름다움도 스스로 눈을 감은 채 보려 하지 않았다.

 아쉽게도 하루의 절반, 인생의 절반만 사랑해왔던 것이었다.


 캄캄한 방 안. 내 편과 나란히 누워 손을 꼭 잡고 있다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당신과 함께하면서 낮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나는 더 이상 해가 세상을 밝히는 시간이 무섭지 않다고.


 내 편은 대답했다.

 나는 당신 덕분에 밤을 사랑하게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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