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사랑하기 전엔 몰랐던 세상
밤공기가 포근했다. 얇은 카디건을 걸치고 나오니 봄이 실감 났다.
봄내음으로 치장한 나무를 한껏 들이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행위를 준비했다. 오늘의 장소는 아무도 없는 아파트 앞 벤치였다. 먼저 소리 없이 자리에 앉고서 휴대폰은 주머니에 넣어두고는 멍 때리기를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살고 싶어 아등바등하던 때가 있었냐는 듯이, 모르는 척, 가로등 불빛 하나에 내 모든 것을 의지하며.
하루 중 유일하게 붙잡고 싶지 않은 시간이었다.
일어난 순간부터 잠드는 순간까지 시간이 흐르는 게 그렇게 아깝더니, 이렇게 가만히 앉아있는 건 괜찮았다. 그 시간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계속해서 흐를 테지만 나의 시계는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한 밤에 나만이 깨어있는 것. 그건 밝은 대낮,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목각인형처럼 뻣뻣하던 내가 살아 숨 쉰다는 기분을 만끽하게 했다. 굳이 손과 발을 써가는 행동을 할 필요가 없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만 보아도. 충분히 나는 살아있었다.
밤이 기다려졌다. 모두가 잠든 이 허공에서 나 혼자 또렷한 정신으로 사색에 잠겼으면 했다. 각자가 맡은 바를 책임지기 위해 달리는 사람들이 그득한 낮에 했다면 비웃음 당했을 내 고민과 생각을 마음껏 하고 싶었다. 나는 왜 그럴까. 더 이상 자책하기 싫었다.
해가 지날수록 밤을 사랑하는 마음은 더 깊어졌다. 이젠 밤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낮에는 그저 그렇게 일하는 목각인형이 되어 살다가 밤이 되면 책을 읽고, 일기를 썼다. 아침에는 조명 없이 밝은 방이 싫어서 거울 없이 출근 준비를 했다. 환한 빛 속에서 내 모습은 내가 생각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점차 어둠이 익숙해져 버려 나는 그림자가 되었다. 나쁘지 않았다. 눈을 꽉 감고만 있으면, 밤은 저절로 찾아왔다.
그렇게 눈을 꽉 감고 있던 어느 날, 밤 대신 내 편이 다가왔다.
내 편은 나무를 만지는 사람이었다. 해가 떠있는 시간이 곧 일하는 시간일 때가 많았다. 아침 7시면 일어나 작업실로 출근하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와 쉬다가 밤 10시면 눈이 슬슬 감긴다고 했다. 내 편이 잠든다는 연락이 오면 나는 스탠드 등을 켜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봄에 만난 우리는 낮에 짬을 내 만나고, 여름에는 밤에 맥주 한 캔을 건배하며 야식을 먹기도 하며, 가을에는 낮에 만나 새벽까지 서로를 안은 채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겨울에는 하루 세끼를 함께하는 날들이 가득했다. 한 번도 쉬어본 적 없는 내가 내 편을 만나는 사계절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쉬는 법을 서서히 배워갔다.
완벽하진 않았다. 어떤 날은 일하는 내 편을 관찰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그의 연락만을 기다리면서 어영부영 보냈다. 다른 날엔 나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만 늘어놓기도 하고, 또 다른 날에는 하루가 허무하게 지나가는 것 같은 두려움에 밤새도록 운 적도 있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일을 한다는 것에 안주하는 내 자존감 하나가 떨어졌으니, 밤에 사색하는 내가 사랑스러워질 리가 없었다.
혼자 방황하는 와중에도 내 편은 끊임없이 하고자 하는 일을 끝까지 해내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나는 어떻게든 꿈을 다시 되찾아오고 싶었고. 이 두 가지가 합쳐지니 나에게도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글을 쓰겠다는 꿈을 펼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고, 그 시간은 밤만으로는 부족했다. 나의 집중력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고, 머릿속으로만 떠올리던 모든 것들을 내 언어로 내뱉기까지가 너무 오래 걸렸다. 거기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까지 고려해봤을 때, 절대 밤에만 살아있을 수 없었다. 나는 부지런해야 했다.
해가 뜨면 자연스럽게 글을 써 내려갔다. 조명 하나 없이 환한 방에서. 지난 몇 년간의 나, 어둠이 내렸을 때만 공상에 빠져있던 나는 결국 자신이 없었을 뿐이었다. 어둠이 걷히고 나타나는 나를 당당히 소개할 수 없었다. 내가 작아지는 모습을 보기 싫어서 낮에 보이는 아름다움도 스스로 눈을 감은 채 보려 하지 않았다.
아쉽게도 하루의 절반, 인생의 절반만 사랑해왔던 것이었다.
캄캄한 방 안. 내 편과 나란히 누워 손을 꼭 잡고 있다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당신과 함께하면서 낮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나는 더 이상 해가 세상을 밝히는 시간이 무섭지 않다고.
내 편은 대답했다.
나는 당신 덕분에 밤을 사랑하게 되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