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위한다는 것

우리가 타인을 위한다는 것이 가능한 걸까

by 조자연

진료실에 종종 환자의 보호자들이 온다.


환자 본인이 아닌,

그 가장 가까운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들.


그들은 때때로 환자가 나에게 하지 않는,

혹은 하지 못하는 말들을 해준다.


"선생님, 저 사람 이 말 안 했죠? 사실은요..."

"이 말은 안 했을 것 같아서 제가 꼭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왔어요..."


'지금 그는 힘들기 때문에 본인이 제대로 판단을 못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제가 그를 잘 알아요.'

라는 숨어있는 그 마음의 바탕에는 다정함이 있다.


분명 사랑과 염려에서 나온 말이다.

그리고 나는 때로 그 말 안에서 중요한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정말 그게 '그 사람'을 위한 일일까.

아무리 아프고, 나약해져도 결정권은 본인에게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어딘가 아파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삶의 주도권까지 앗아가서는 안 되지 않을까.



그것은 엄마와의 마지막 통화였다.

그리고 내가 들은 엄마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대학병원에 입원 중이던 엄마가 전화를 했다.

"여기 말고, 좀 편안한 병원으로 옮기고 싶어."


나는 그 말에, 정확히 묻지 않았다.

아니 묻지를 못했다.


'편안한 병원'이 어디를 의미하는지.

엄마가 말하려던 것이 정말 '호스피스 병원'이었는지, 나는 지금도 모른다.


그때 나는,

그 말의 무게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엄마를 대신해, 엄마의 뜻과 다른 결정을 내려야 할지 아닌지를 몰랐다.


지금도 한번씩 생각한다.

그때 내가 엄마의 마음이 아닌 내 의지로 결정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내가 만나는 환자의 언어와 보호자의 언어가 다른,

혼란스러운 오늘 같은 날은 이런 생각이 든다.


누군가를 위한다는 건 어디까지일까.

그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이, 혹시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를 위한다는 것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


최근에도 진료실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환자가 나간 뒤 보호자가 잠시 후에 들어와서 이렇게 말한다.

"약을 너무 많이 먹고 있으니, 한약은 말고 침치료만 해주세요."

보호자의 말은 언제나 선의다.


하지만 환자는 종종 다르게 말한다.

"이 힘듦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약이 있으면 처방해 주세요."


그럴 때 마음이 아프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고통을 대신 결정해 버리는 순간,

그 사람의 '살아 있는 의지'가 함께 지워지는 것 같아서.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완결성을 가진 존재가 아닐까.


환자들은,

그들의 말과 행동, 표정과 호소가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이다.


그런데 가장 가까운 사람의 말이 그 완결된 흐름에 개입할 때,

그들의 고유한 질서가 흔들린다.

그때 나는 혼란스러워진다.


치료자와 환자 사이에 말로 다 설명되지 않는 감각이 흐르는 길,

함께 만들어가는 미묘한 신뢰의 결.


그런데 그 사이에 끼어든 한 문장이, 그 완결성을 흔들 때가 있다.


내가 환자만을 보지 못하고, 그를 사랑하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

나는 다시 묻게 된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건 환자인가,

아니면 환자를 둘러싼 사랑의 방향인가.


답은 여전히 내 안에서 끝나지 않고 있다.


어쩌면 '타인을 위한다'는 건,

그의 완결성을 믿어주는 일일지도 모른다.




오늘은 환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에게 꼭 전하고 싶던 말을 삼켰다.

그를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나는 조금 쓸쓸하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