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야기는 누구의 것인가

의사로 들은 이야기, 창작자로 지켜낸 문장

by 조자연


"누군가의 통증은,

늘 한 편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아픈 곳을 말하러 온 환자들은,

사실은 아픈 시간을 꺼내놓는다.


기운이 없다,

소화가 안 된다,

잠이 안 온다...


그런 말들 뒤에는 늘,

한 사람이 살아온 시간이 숨어 있다.


진료실 문이 열릴 때마다,

나는 또 하나의 인생과 마주한다.



그날도 그랬다.


진료실에 처음 들어오는 사람은

대체로 경계하는 얼굴이다.


'자신이 어디까지 말해도 되는지,'

'이 사람이 자신을 제대로 도와줄 수 있을지,'


조심스레 살피고,

나름대로 가늠해 본다.



그는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다

조용히 내 맞은편에 앉았고,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침에 눈을 떠도 일어나고 싶지가 않아요.

이런 게 그냥 피곤한 건지,

병이 된 건지 모르겠어요."


그 한마디는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그 말을 꺼낼 때의 모습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던 그는,

문득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오른손으로 왼손 손가락 네 개를

천천히 감싸 쥐었다.


상대의 반응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끝을 조절하는 사람처럼 보여

더욱 마음이 쓰였다.


진료가 끝난 뒤에도 그 장면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나는 그날의 흔적을 글로 붙잡아두고 싶어졌다.


글 속에서는 다른 이름을 붙이고,

평범한 직장과 나이를 덧입혔지만,

그가 남기고 간 조심스러운 움직임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며칠 뒤,

그 글을 읽은 누군가가 물었다.


"이 이야기, 환자한테 허락받고 쓰신 거예요?"


순간 멈칫했다.


'내가 누군가의 인생을 훔친 걸까?'

그 질문은 한동안 마음속을 맴돌았다.


나는 의료인으로서,

환자의 이야기를

이렇게 글로 옮겨도 되는지 고민했고,


창작자로서,

다른 사람의 삶을 빌려

글을 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곱씹게 되었다.


'그럼 이 글은 누구의 것인가?'


그 물음 앞에

조심스럽고도 낯선 단어 하나가 걸렸다.

저작권.


저작권은

유명작가나 방송작가, 유명가수처럼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는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일인 줄 알았다.


그래서

한 번도 나를 위한 이야기라

생각해본 적 없었다.


법이라는 말도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크게 불편한 일 없이 살아왔고,

일부러 가까이 두려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그 단어를 다시 들여다보게 됐다.


내가 겪은 장면, 느낀 감정,

머뭇거리며 써 내려간 문장 하나하나가

누군가에게는 그저 흔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나에겐 내 마음을 담은 기록이었다.


그 순간,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작권은 단지

무언가를 '가졌다'는 표시가 아니라,

내가 느낀 감정을 어떻게 표현했는지를

지켜주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사실이나 경험에는 저작권이 없다.

누군가의 삶은 누구나 말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언어로 풀어냈느냐는

온전히 글을 쓰는 사람의 몫이다.


같은 말을 들어도

각자 다른 문장을 쓰게 되는 이유,

거기서 글이 시작된다고 믿는다.


나는 다만,

그의 고통을 내 안에서 오래 붙들고 있었다.

그 마음이 내 안을 지나가며 남긴 결을,

조심스레 문장으로 옮겨본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통해 쓰였지만,

결국 나의 감정이 담긴 글이 되었다.


저작권은 어쩌면

그런 표현들에 붙는

조용한 이름표 같은 것이 아닐까.


창작자를 위한 법적인 장치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이 감정은 분명히 나의 것이었다' 라고

스스로를 인정해 주는 작은 테두리.


나는 이제 글을 쓸 때,

조심스럽지만 분명한 마음으로

내 이름을 붙인다.


이건 내가 들은 이야기이자,

내가 살아낸 문장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진료실에서 들었던 수많은 이야기들은

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이

내 안을 지나,

내 문장이 되었을 때,

그건 분명히 나의 일부가 된다.


나는 이제 막 글을 쓰기 시작한 사람이다.


지금까지 나는 내 것을 굳이 주장하며

살아온 사람이 아니었다.

내 이름을 앞세워 말할 만한 게

있다고 느낀 적도 없었다.


하지만 이 글은,

내가 진심으로 바라본 순간들이 남긴

마음의 흔적이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조용히 내 이름을 적어두고 싶다.


이건 누군가의 이야기로 시작됐지만,

끝까지 내 언어로 걸어온,

분명한 나의 문장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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