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나를 이해하고, 지금의 나를 다정하게 돌봐야 할 때
"선생님, 이거... 만성이라서요.
잘 안 나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진료실에 들어온 한 환자분이
조심스레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을 꺼낼 때의 표정은
이미 반쯤 포기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왜 우리는 '오래됐다'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무거워질까?
겉으로는
'이렇게 오래되었으니,
앞으로도 나아지기 어렵겠지?'
하는 체념처럼 들리지만,
의외로
내가 그 순간 가장 많이 목격한 것은
'만성'이라는 말 앞에서 하는 '반성'
그동안 자신이 거쳐온
시간과 선택을 돌아보는 모습들이다.
"그때 병원을 갔어야 했는데..."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는데..."
"그땐 괜찮아지겠지 하고 넘겼는데..."
그 말들 속에는 후회와 자책,
그리고 묵직한 무력감이 담겨 있다.
사실 처음엔 증상이 가볍기도 했고,
치료를 미루게 만든 이유들도 있었다.
삶이 바빴고, 피곤했고,
병원 갈 시간조차 없었고,
혹은
병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마침내 '만성'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몸보다 더 아픈 것은
스스로를 돌보지 못했던 시간에 대한
자책의 무게이다.
어떤 때는
그 무게가 타인이나 상황 탓이 된다.
그때 나를 도아주지 않았던 가족,
나를 몰라준 회사,
치료를 미룰 수밖에 없었던 현실.
억울함과 분노가 떠오른다.
또 어떤 때는
그 책임이 자기 자신에게로 향한다.
'내가 미련해서'
'내가 게을러서'
'다 내 잘못이야'
이 모든 마음에는
바꾸고 싶다는 간절함이 담겨 있다.
하지만 그 책임이
현재의 자신을 짓누르기 시작하면,
몸보다 마음이 먼저 무너진다.
그래서 환자들은
증상이 다시 올라올 때마다
단순히 불편함만이 아니라,
그때의 자책감과 두려움까지 함께 끌어올린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해 본다.
그렇게 오래 함께해 왔다는 건,
몸이 그만큼 잘 견뎌주었다는 뜻이다.
그 시간 동안
몸은 수없이 회복하려 애썼고,
지금까지도 버티고 있다는 건
앞으로도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만성'이라는 단어는
단지 진단의 형식일 뿐이다.
미래를 단정하는 말은 아니다.
그러니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때를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그 시기의 당신도,
할 수 있는 만큼을 한 거예요."
사실
그때 병원에 왔었더라도
지금과 아주 다르지 않았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병이란
단지 '언제 치료를 시작했느냐'만으로
결정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때의 몸 상태, 마음의 여유, 생활환경까지
수많은 조건이 겹쳐야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당신은
모른 채 넘긴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감당할 수 없었던 시간을 견뎌온 것이다.
그것이 무책임했던 것도,
게을렀던 것도 아니다.
그 시기의 당신은,
그저 ‘살아내는 것’이 최선이었을 뿐이다.
그러니 이제,
자신을 돌보기 시작한
지금부터 다시 시작해도 괜찮다.
회복이란
과거를 바로잡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돌보기로 선택하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