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 여행
걷기 여행을 처음 시작한 것은
고3 여름.
방학이었지만,
거의 모든 기간을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으로 보내고
그 끝에 주어진 단 3일간의 휴가기간이었다.
이제는 국민 베스트셀러인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에
푹 빠져있던 나는,
"감은사 탑을 보겠다!"
는 참 단순한 생각만으로
혼자 경주행 버스에 올랐다.
경주에 도착해,
시내버스를 타고 박물관과 안압지,
불국사를 둘러본 나는...
최종 목적지인 감은사지로 가기 위한
버스편을 알아보던 중.
보문단지 앞 삼거리에서
한 도로표지판을 발견했다.
감포 20km
"그래.. 그 까짓 20키로... 걷자."
운전을 해봤을리도 없고,
손에는 스마트폰은 커녕
지도 한장 없던 까까머리 고3에게,
20km 정도는,
축구로 다져진 두 다리가 충분히 감당할
거리감이라 느껴졌다.
그러나...
그렇게 산을 하나 넘어야 하는지 몰랐다.
산 하나가 문제가 아니라,
인적이 뜸한데다,
가끔 트럭이나 한대씩 지나다니는 도로변을
어디가 어디인지도 모른체
물 한병없이 걸어야만 했었다.
산 중턱에서 죽겠다 싶었는지,
결국 나는 손을 들어
지나가는 차를 얻어타기로 했다.
요즘 같아서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히치하이킹
을 인생 처음으로 시도하는 순간이었다.
결과는 좋았다.
첫번째, 얻어탄 갤로퍼는 운전자가 스님이셨다.
차안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고3인 나를 크게 격려해주셨고..
감은사탑을 보러간다는 내 얘기에,
"그럼 여기도 한번 들렀다 가게~"
이러시면서, 나를 기림사라는 절에 내려주셨다.
정말 감사했지만,
결국 내 여정은 5km가 더 늘어났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내 다리는 이미 감각이 없다.
머릿속은 하얗다.
그랬더니...
나를 둘러싼 풍경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산, 들판, 개천, 절 풍경, 시골 사람들...
걷고 걷다가,
길가에 잠시 앉았다가를 반복하던 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맑아짐을 느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내 발걸음, 내 심장의 두근거림
오로지 내가 걷고 있는 그 길에
집중하게 되었던 것이다.
땀범벅이 된 채 그렇게 혼자 걷던 그 기분이
나는 싫지 않았다.
가끔씩 불어오는 미풍에
오히려 시원함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마침내, 눈앞에 마주친 두 개의 탑.
"아!......"
지금도 생각해봐도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고3 시절이다.
아버지의 명퇴,
그 이후 개업한 식당에서의 부모님의 고생.
혼자 힘으로 아무리 발버둥쳐도
오르지 않는 성적.
무거운 스트레스의 일상속에서도,
잠깐 한발짝 살던 곳을 벗어나
낯설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내 두 다리로 걸어내고
그 과정에서
주변 풍경을 보고, 느끼고,
또 사람들을 만나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있는 나를 다시 찾고
현재에 감사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경험한 순간이었다.
탑돌을 쓰다듬어보다가,
또 감포앞바다에서 문무대왕릉을
한참 바라보고 앉았다가...
지나가는 차를 울산까지 얻어타고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게...
내 인생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나의 즐거운 도보 여행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