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지 않기에 대해 논하려면 내가 살고 있는 이 집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 봐야 한다. 퇴근길에 세탁소를 들려 옷을 가지고 걸어 올라오다가 내가 일년 가까이 산 이 15평 남짓한 방이 있는 건물을 돌아봤다. 집이자 자취방이자 빌라이자 결정적으로는 와르르맨션. 내가 유쾌하게 와르르맨션이라고 말할 때마다 사람들은 웃어주었다. 이제는 페인트칠도 하고, 계단도 뜯어 고치고, 입구에 지지대도 세워놓으니 '와르르맨션' 티는 제법 벗었다. 급하게 전세집을 찾느라 연식이 꽤 있으면서 값도 싸지 않은 곳에 어느새 일년이나 눌러살게 되었다. 내년에 계약 끝나면 더 좋은 아파트로 갈거야, 엘리베이터 있는 곳으로 갈거야,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으면서 방금은 여기에 더 오래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 집에서 내가 미룬 것들이 너무도 많아서.
세탁소 아저씨는 무거운 겨울 옷들을 배달해 준다고 했다. 겨울 옷 찾기를 미루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한없이 미뤘다가는 세탁소 아저씨가 공짜로 배달해주지도, 돈을 깎아주지도 않으셨을 테니까.
옷을 찾고 올라오는 길에는 주차된 택시를 봤다. 우리 라인에 사는 기사님이실까? 작년 비가 많이 오던 어느 날, 나는 광주에 가기 위해 터미널로 가는 택시를 잡고 있었다. 버스 시간은 다가오는데 택시가 잡히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 때 우리 라인에서 내려온 아저씨가 내 핸드폰 화면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이다. 괜히 짜증만 더 치밀어 올랐다. 이상한 아저씨가 자꾸 쳐다본다. 예민한 위험신호가 발동했다.
'택시 잡아요?'
'아..네.'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카카오택시가 보이길래. 잘됐네. 지금 비 와서 안 잡힐거여. 나 이제 택시 운행할라고 나가는데 탈래요?'
당연히 네. 아저씨는 명함을 내밀면서 멀리 갈 때 연락하라고 했다. 공항 같은 곳 갈 때, 연락하면 좋잖아요. 네네, 맞아요.
그 후로 공항을 간 적은 세번이나 있었다. 멀리 간 적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다른 택시를 잡거나 내 차를 탔다. 다음에, 다음에 꼭 불러야지. 이렇게 되뇌면서.
옆집 할머니댁 문에 붙은 안내 전단지는 한달 가까이 떨어지질 않는다. 나이가 한참 적은 나에게도 매번 선생님이라고 불러주시던 할머니. 작년에 자주 가져다 주셨던 카레 맛이 혀끝에서 맴돌았다. 입맛이 없어서 자려고 누워 있을 때도 그 카레를 받으면 왜인지 입맛이 돌았다. 억지로라도 몸을 일으켜 먹으면 또 저녁을 보낼 힘이 났다. 할머니의 요리 방식은 우리 엄마한테서 요리를 배운 나와 비슷했다. 일단 재료는 많이 때려넣기. 크지 않은 대접에 호박, 양파, 당근, 고기 특히 많이, 두부도 많이. 건더기가 많은 할머니의 카레는 당연히 맛있었다.
올 봄에 만난 할머니는 나에게 지난 겨울을 병원에서 보냈다고 알려주셨다. 엄마는 롤케이크 같은 걸 사다드리라고 했다. 알겠어, 다음에 들려야겠다. 근데 할머니가 그렇게 단거 좋아하실까? 할머니가 더 좋아하실 만한 걸 찾아봐야겠다.
롤케이크는 후순위로 미뤄졌다. 할머니가 더 좋아하실 음식을 찾느라 바빴다. 롤케이크를 파는 빵집 앞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치기 바빴다. 출근하느라 바빴고, 퇴근하느라 바빴다. 더 이상 카레를 가져다 주시지도 않았고, 우연히 마주치지도 않았다. 언제 롤케이크를 드릴 수 있을까.
얼마 전에는 반려동물 장례식장을 알아봤다. 여수에 새로 생겼고, 목포에 또 새로 생긴다고 했다. 가람이는 이제 내가 오는 소리를 잘 듣지 못한다.
기억은 미룬 사람에게만 선명하게 남는다. 내일 해야지, 진짜 내일 해야지, 다음주에 해야지, 정말이지 다음에는 꼭... 몇 번이고 곱씹다 보면 마치 내가 했나 안 했나 헷갈리는 지경까지 이르기도 할 테다. 정작 본인 마음에만 있을텐데.
또 내가 미루고 있는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 미뤄도 괜찮은 것들이 몇개나 있을까. 이 글은 미루지 않으려고 한다. 몇 번이고 퇴고를 할 수 있겠지만, 밥을 먹은 후에 올리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미루지 않는다.
- 옆집에는 새로운 이웃이 들어섰고, 가람이는 무지개 다리를 건넌지 이년이 되었다. 정들었던 집을 잠깐 떠나 타국에서 살며 꺼내보는 이년 반 전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