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고 나면 소중한 볕
홍대에 자주 들르게 되면서 알게 된 단골 카페. 카페 제인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처음에는 흡연구역에서 사장님과 몇 번 목례를 주고받다가 우연한 계기로 서로의 삶에 대한 대화를 하게 됐다. 당시의 나는 21살, 이제 막 학생티를 벗어나려는 사내를 그녀는 꽤나 진지하게 대해주었다. 이성적인 교류가 아닌 사람대 사람으로서, 내가 성인이 되어서 처음으로 말을 트게 된 어른이었다. 당시 나는 사고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연필과 종이를 자주 찾았는데 두세 시간을 앉아있어도 눈치한 번 주지 않으셨으며 가끔 떡볶이나 간식을 사 와서 같이 나눠주시고는 했다. 사회라는 것에 첫발을 디딘 직후에 자아를 확립하는 그 정처 없는 시기에 안전하고 따뜻한 공간이 되어준 카페를 아마 오랫동안 그리워할 것이다. 지금은 문을 닫은 지 몇 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그 골목을 지날 때마다 카페 제인과의 추억이 선명하게 피어난다.
학교 동기들과 에버랜드에 놀러 갔던 날이다. 당시에는 전과하기 전이라 나는 디자인과에 몸을 담고 있었다. 과 특성상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일이 잦았는데 그래서인지 선후배들과 금방 친해졌다. 물론 한창 유행하던 ‘오버워치’라는 블리자드의 게임이 발화점이 되어 우리는 거의 격일로 모여 pc방에서 밤을 새우고 뜨는 해를 함께 보며 집에 가곤 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나는 그것을 매우 위험한 행동으로 여겼다. 공부를 하지 않고서 다른 일에 시간을 쏟는 일. 그도 그럴 것이 장학금을 받지 않으면 고등학교와 대학 등록금을 충당하기 어려웠던 당시 가정형편이 꽤나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기에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자기 최면을 걸어야 했다. 다행히 재수 없이 부모님이 바라시던 서울대 디자인과에 입학했다. 등록금이라는 커다란 걱정을 하나 덜어내니 나도 조금은 자유를 하나씩 찾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입학하고 일 년이 지나 담배를 배웠고 조금씩 모은 돈을 보태서 오토바이를 사기도 했다. 부모님이 좋아하지 않는 일, 이전에 나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위험한 행동들을 하나씩 추가하며 지금의 내가 됐다. 우리에 갇힌 동물들은 안온하다. 하지만 그들은 어쩌면 당장의 끼니를 스스로 해결하며 잦은 위험과 맞서야 하는 자유의 땅을 매일 그릴지도 모른다.
사랑은 승인불확실성이 꽤나 높은 결재서류와도 같다. 승인을 받을 수 있는지는 미지수이고 누군가는 웃는 얼굴로 서류를 찢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일 사랑을 찾아간다. 그러나 더한 모순은 계약 체결 직후 절박함과 소중함의 폐기처분에 있다. 이는 물론 계약 조건과는 다른 상황이기에 갑은 을에게 취소를 통보하겠다. 그러면 을은 또 다른 서류를 들고 사인을 받기 위해 고군분투를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갑은 을이 되고 을은 갑이 되기도 하며 수많은 관계 역전이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모른다. 갑과 을이라 칭하지만 실은 그 누구도 갑과 을이 아니며 이 변칙적인 변화와 전환의 법칙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하겠다. 복권은 밑져야 본전이기 마련이다.
우리가 보통 미련을 갖게 되는 것들은 대개 익숙함에 가려진 소중함이 존재한다. 이맘때즈음 구제옷들을 좋아하게 되면서 그 밖에 낡은 것이나 남의 손때가 탄 물건들에 눈이 가기 시작했다. 지금 여러 작업들의 전신과도 같은 가치관이 생성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기다. 소중한 것은 그리 특별하지만은 않다. 낡은 것들의 쓰임이 다했다고 여겼을 때 그들은 새로운 모습과 미감을 갖게 되었고 그렇게 잠깐이나마 사라지기 전 마지막 발화를 보이게 된다. 이와 같은 시선은 물건을 넘어 풍경에 이르게 된다. 구옥의 물떼, 깨진 아스팔트에 피어난 민들레와 같은 것들 말이다. 자주 보이는 것들은 생각보다 제 이야기를 열심히 떠들곤 했다. 귀를 기울이지 않아 들을 수 없었던 재미난 이야기가 우리의 출퇴근 길에도 널려있지 않을까.
예전에 아주 잠깐동안 맥도날드에서 나만의 버거를 만들어 먹는 메뉴가 있었다. 번과 소스, 고기와 속재까지 모두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 말 그대로 ‘나만의’ 레시피를 만드는 것에 몰두하곤 했다. 여유가 되는 날엔 패티나 베이컨을, 그렇지 않은 날에는 치즈의 염분으로 빈 곳을 달랬다. 가격이 만원정도 해서 자주는 사 먹지 못했지만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사치를 나만의 버거를 만들며 사치를 부리곤 했다. 친구들과 가지각색의 버거를 늘어놓고 하나씩 시식을 하면서 우리만의 만 원짜리 오마카세를 즐겼다. 어느샌가부터 그런 소소한 즐거움이 일상에서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번 달 지출과 수입을 나열하는 매일의 연속, 다음 달은 얼마를 모으고 얼마를 써야 하는지가 매달의 주요 고민거리가 됐다. 하루하루 백 원 단위를 줄여가면서 살았었지만 그때만의 즐거움은 아마 다시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예술은 배고파야 된다는 말을 나는 좋아하지 않았다. 마치 부자들이 미술을 끄적이다 그만두고 하는 핑계와도 같은 말처럼 들렸기에. 돌이켜보면 나는 꽤나 자격지심이 많은 사람이었나 보다. 비어있는 만큼 다른 것을 채울 수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은 깨닫는다.
지금에야 젠틀몬스터는 ’젠몬‘으로 불리며 대중적인 브랜드로 자리매김했지만 당시에는 이제 막 만들어진 브랜드로 그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을 아니꼽게 보는 시선이 우리나라에는 여전히 많다. 카페를 찾아다니는 걸 좋아하던 나는 어느 날 신사에 위치한 특이한 카페를 알게 됐다. 2층에는 가운데에 긴 소파만 덩그러니 있었고 그 주위를 흙에 심어놓은 인조 갈대밭이 있었다. 테이블 회전율을 최고로 우선시해야 하는 카페카 테이블보다 더 많은 공간을 갈대에게 내주었던 것이다. 인테리어도 당시 유행하는 미감과는 조금 거리가 멀었다. 갈대는 바싹 마른 색의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이와 더불어 차가운 소재의 인테리어 디자인은 그 특유의 날이 선 감각을 더했다. 훗날 그 카페는 문을 닫았지만 나는 분명 어딘가에서 그들의 일을 이어갈 거라 믿었다. 세간의 수많은 부정을 부정하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