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2월 -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았던 것

담벼락에 낀 비닐 화분처럼

by 한자연

대학시절 디자인에서 서양화과로 전과를 결심한 나는 기술적인 선들을 잠시 내려놓고 순수하게 나로부터 시작하는 선의 모양을 찾고자 했다. 어느 날, 초등학교 5학년때 그린 그림 하나가 눈에 들어왔는데 서툴고 거친 선들 투성이었지만 그 안에는 무언가 담겨있더라. 자동차를 주로 그리던 나는 디자인의 기계적인 형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한동안은 길가에 핀 꽃이나 가로수를 그리는 것에 열중했다. 비정형의 선들을 모아 형태를 만들다 보면 어릴 적에 아무것도 모르고 그었던 선들을 다시 마주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품고 매일 집을 나섰다. 이는 꽤나 구시대적인 사생에 가까운 행위였지만 나는 그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좋았다. 인상파의 그것과 유사하게, 바람에 흔들리는 형태와 시간에 따라 바뀌는 그림자를 좇았다. 그러다 보니 몇 년간 글로써 두루뭉술하게 이해한 것들이 단번에 명쾌해졌다. 그림은 학문과 달라서 습득이 아닌 체득으로만 채워지는 부분이 존재한다. 비록 그것이 동시대적인(contemporary) 담론에서 한참을 벗어난 것의 일부일지라도, 또 그렇기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해답을 찾을지도 모른다.

친구가 재미 삼아 서명한 하트모양으로 감열 된 자국을 보고 그렸던 그림이다. 가끔은 그림이라는 것이 대단하고 무거운 이야기를 다뤄야만 하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과 회의감이 들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다. 몇 년간 비슷한 형상의 작업을 이어왔다. 그러나 이따금 이러한 행위에 대한 당위성을 찾고자 여러 가지 생각들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으나 늘 해답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 이는 작업을 이어가는 한 끝없는 과정이 될지도 모른다. 그림이 다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 정답이 없다기보단 무한하다. 그런 연유로 나는 붓을 놓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유의미한 이미지에 대한 고민의 반복 속에서 나는 사고를 인지하는 순간을 즐긴다. 아마 온전하게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은 그뿐일지도 모른다.

종이 빨대, 텀블러 사용하기, 전기차 전환정책 등 다양한 환경 규제들이 등장하는 시대다. 물론 그러한 작은 움직임들이 언젠가는 환경을 보호하는 것에 유의미한 성과를 거둘 것이고 우리의 후손은 지구의 자연을 조금 더 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때로는 질소 가득한 과자봉지 같은 주장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가면과도 같은 그들의 입장은 속에 감춰둔 무엇인가 존재하기도 했다.

처음으로 캔버스를 걸어본 전시는 강서에 위치한 더플롯커피였다. 처음으로 회화작업을 걸어보는 전시라 부담감이 컸다. 비록 갤러리나 유명한 공간은 아니었지만 어린 나이에 주어진 기회는 꽤나 값지고 소중했으니까. 사장님은 그 이후로도 언제든 전시를 하고 싶으면 날짜만 잡으면 되니 편히 말해달라고 하셨고 나는 종종 이 카페에서 개인전을 열어 다양한 실험을 해볼 수 있었다. 한 2년은 초기 작업들로 여러 종류의 전시를 열다 보니 자연스레 하고 싶은 작업의 갈피를 잡아나가게 됐다. 그렇게 2016년 플롯과의 첫 만남으로부터 9년이 흘렀고 갤러리와 조금씩 연이 닿게 된 나는 이제 제자들의 전시를 종종 이곳에서 열어주곤 한다. 분명 나는 그대로인데 왜 이리도 많은 것이 흘러가고 변하는지.

콘크리트 담벼락 사이에 낀 비닐 화분에서 피어난 꽃을 마주했다. 이리저리 찌그러진 화분은 누가 키우는 것이라기에는 그 행색이 초라했고 주변엔 화단 하나 없는 골목이었다. 무채색의 공간에 피어난 꽃은 꽤나 만화적이고 이질적인 풍경을 연출했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어느샌가부터 절경이 아닌 풍경에 눈이 갔다. 여행을 떠나야만 마주하는 랜드마크와의 기념촬영보다는 고가 도로를 올라갈 때 하나씩 켜지는 가로등 같은 풍경 말이다. 익숙함에 가려진 순간의 포착만이 주는 편안한 설렘이 좋았다. 그리고 나의 그림이 그런 풍경이 되기를 바란다. “딱히 특별할 건 없어 보여요, 근데 눈이 가네 뭔가.” 어느 냉소적인 비평가의 코멘트를 곱씹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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