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담배는 유난히 향이 짙다
영국여행을 갔던 2016년에는 런던에 살고 있는 이모와 함께 여기저기를 다녔다. 이모와 빈티지 마켓을 찾은 날이었던가, 나는 처음으로 스타벅스에서 다른 메뉴를 시켜보았다. 내가 마셔왔던 건 아메리카노와 라떼, 그리고 겨울에만 찾는 핫초코가 전부였다. "어우 자연아, 촌티 내지 말고 이모가 시키는 거나 먹어봐." 이모는 아주 기다란 이름의 메뉴를, 자바칩프라푸치노를 두 잔 주문했다. 내가 너무 맛있다며 한국에 돌아가면 꼭 이걸 다시 사 먹겠다고 말하자 그녀는 꽤나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의기양양하게 카페의 문을 열고 나섰다. 이모는 내게 친구 같은 가족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가깝게 지냈고 부모님은 모르는 비밀들도 시원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어른이 이모였다. 무거운 공기를 참지 못하는 이모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가볍게 띄우곤 했고 그녀의 촌철살인은 가족들에게 늘 웃음을 가져다주었다. 지금도 스타벅스에 가면 이모가 시키던 메뉴를 종종 찾는다. 자바칩은 이모의 농담처럼 달콤하고도 씁쓸하게 씹힌다.
합정역 근처에는 독특한 카페가 하나 있었다. 그날은 새로운 카페를 찾아 이곳저곳 걸어 다니던 날이었다. 합정의 골목은 너도 나도 얼굴을 들이미는 가게들로 붐비는 곳이다. 보행에 방해가 될 만큼 가게들은 저마다의 물건을 탁상에 꺼내 두었고 인도는 무의미한 길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인도와 차도를 오르락내리락하며 걷던 중에 비어있는 공간이 나타났다. 건물 사이에 공터가 있었고 움푹 들어간 곳에 나지막한 건물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다소 거친 글씨로 쓰여있는 '고래 상점'을 마주쳤다. 나는 그 기묘한 공백을 선전하는 카페로 발걸음을 향했다. 내부에는 노란 할로겐 조명들이 많았고 천장에는 커다란 수술대 조명이 샹들리에마냥 걸려있었다. 마치 sf 영화나 디스토피아물에서 볼 법한 낡은 수술대 조명은 한창 빈티지에 빠져있던 나를 붙잡아두기에 충분했다. 그날은 영수증을 받자마자 저 조명을 그렸다. 오묘한 에메랄드색 페인트와 사이에 핀 녹들을 눈으로 훑으며 그동안 보았던 영화와 드라마들을 기억으로 훑었다. 인류를 위협하는 바이러스와의 사투, 감염자를 살리기 위한 인턴 의사의 간절한 수술을 떠올리며.
크림드에펠을 따뜻하게 먹어 본 날. 늘 차갑게 먹는 메뉴였지만 겨울담배를 피우고 얼어버린 손은 따뜻한 잔을 소망했다. 따뜻한 크림드에펠을 한 입 마시자마자 나는 도로 밖으로 나가 담배를 태웠다. 따뜻한 에스프레소 위에 놓인 차가운 크림이 겨울에 피는 담배와 너무도 잘 어울렸다. 겨울의 담배는 유난히도 맛이 좋다. 온통 차가운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것만이 뜨겁게 불타고 있다. 들이마시는 연기는 뜨거우나 이내 내뱉자마자 김인지 연기인지 모를 무언가로 흩어진다. 그 애매한 호흡과도 같은 음료였다. 차갑게 입술에 닿은 크림 뒤로 밀려오는 뜨거운 에스프레소의 감촉, 그리고 불을 붙여 들이마신 연기와 내쉴 때의 찬바람은 겨울의 인상이다. 서로 다른 온도의 충돌과 뒤섞임으로 그 향미가 짙어지는 계절이었다.
엄마와 동생은 군것질을 좋아한다. 나는 끼니를 떼우는 것 이외에는 잘 집어먹지 않는 데에 반해 동생은 방에 과자 박스를 하나씩 두고 먹는 버릇이 있다. 엄마도 빵이나 쿠키를 한 상자씩 사들고 장보기를 마무리하곤 했었다. 영국을 여행하면서 나는 한국과자와 다른 맛을 경험했다. 덜 자극적이며 밀가루와 버터 본연의 맛이 조금 더 살아있는 과자들에는 그나마 손이 갔다. 과외를 하던 카페 근처에 있던 세계과자집을 보고서 엄마랑 동생이 생각나 레몬쿠키를 집었다. 지난번에 동생이 다음에도 사다 달라고 했던 과자였는데 마침 세일기간이라 냉큼 집어 들었다. 한국 과자보다는 가격대가 있어 당시 나의 지갑사정으로는 한가득 사들고 갈 수가 없었다. 언젠가는 원 없이 사주는 장남이 되겠노라 다짐했는데 생각보다 어려운 지점이었다. 8년이 지난 지금, 이따금 울리는 배달 어플 알림은 모두 동생과 엄마의 주문이다. 괜찮다고 몇 번을 말해봐도 아들 돈은 함부로 쓸 수 없다며 고작 치킨 한 마리 값도 꼬박꼬박 보내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 엄마. 나중에 알고 보니 동생은 한 술 더 떠서 형에게 돈을 보내지 않으면 먹지 않겠다는 유치한 으름장도 놓았다고 한다. 고리타분한 표현을 빌리자면, 돈으로 살 수 없는 보물을 나는 이미 가졌는지도 모른다.
에곤 쉴레의 그림에는 빛이 없다. 사물이 가진 고유의 형태를 무너뜨림과 동시에 충실히 재현에 임하는 모순적인 그림. 나는 그 경계에서 흔들리는 그의 그림이 좋았다. 빛의 재현이 두드러지던 시기에 그는 형상과의 씨름에 몰두했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선과 면의 연속은 마치 해먹에 눕는 것처럼 불안한 시작과 평안한 안착이 공존했다. 그림은 의미를 명확히 하는가 싶다가도 모호한 형상으로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정해진 길이 없기에 흥미롭고 어려운 붓질이다. 이따금 인터뷰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무슨 생각을 하냐는 질문을 종종 받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난처함을 열심히 포장해야 했다. 사방으로 뻗은 구조물의 연속인 세계에 놓인 하얀 평면 위에서 만큼은 그 공백을 채울 권리와 자유가 내게 주어진다. 단지 그뿐인 이유를 어떤 말로 더 설명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