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내야 들어차는 것들
채식주의자의 외식은 일요일 밤 문을 연 약국을 찾는 것처럼 번거로운 일이 다반사였다. 9년 전에는 채식이라는 것이 한국에서 그리 쉽게 볼 수 있는 식습관은 아니었기에 지금처럼 비건식당이나 관련 음식들을 만드는 곳이 몇 군데 없었다. 그래서 당시 연인이었던 K와의 외식에는 늘 자그마한 여정이 함께했다. 고기가 조금이라도 들어가지는 않는지, 저녁에는 문을 닫지 않는지 등 몇 없는 식당들에서도 상황에 맞는 곳을 고르고 골라야 비로소 식탁에 앉아 주문을 할 수 있었다. 원래의 나는 그다지 채식을 즐기지 않았지만 우리가 처음 밥을 먹기로 한 날에 그녀의 식습관에 맞춰주고 싶은 마음에 내키지 않는 샐러드를 어렵게 골라 시켰다. 그러나 이 채식이라는 것이 꽤나 방대한 메뉴와 레시피를 지녔을 줄은 미처 몰랐으니. 처음 맛보는 재료의 조합은 날 것을 좋아하고 육류에 절여진 나를 매료시켰고 나중에는 오히려 내가 새로운 샐러드 맛집을 찾아 그녀를 데려가는 일에 재미를 붙이게 됐다.
재료를 사면 마음이 무거웠다. 당시에 나는 그리 소득이 변변치 않았기에 학교 화방에서 이모와 이걸 쓰면 얼마나 저렴하게 오래 쓸 수 있는지에 대해 한참을 계산하고 토론하곤 했었다. 주변 동기들이나 선후배들은 종종 재료의 값에 따른 질의 차이가 작업에 주는 영향에 대해 논의하곤 했는데 당연 품질의 차이는 있지만 당시의 우리에게는 그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선지 지금도 그다지 고가의 재료에는 관심이 없다. 물론 고품질의 안료와 접착제는 꽤나 기분 좋은 느낌을 주지만 그만큼의 효용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다. 최근 72색의 오일 파스텔을 구매할 때 가격차이가 3배 이상 나는 걸 두고 나는 망설였다. 이제는 닿을 수 있는 가격임에도 나는 관성처럼 국산 파스텔을 집었다. 좋은 재료로 작업에 임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없다. 그 또한 작업을 대하는 다양한 태도 중 하나가 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내게는 분명 그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는 저금리 전세자금 대출을 받았다. 달에 십 오만 원 정도, 혼자 사는 대학생에게 부담 없는 월세로 나의 드림 하우스를 상상하며 부동산을 돌았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러한 정부 복지에 호의적인 집주인들이 많지 않았다. 절차도 복잡했고 무엇보다 융자금이 없는 건물이어야 하는 이 까다로운 조건 탓에 관악에서 출발한 나의 보금자리 구하기는 마침내 가좌역 언저리까지 올라가게 됐다. 디지털 미디어 시티역이라는 새로 지어진 역 근처에는 아직 재개발 직전의 나지막한 건물들이 남아있었다. 지붕은 두꺼운 천막으로 되어있었고 내부는 깔끔하게 리모델링 됐지만 밖에서 보면 영락없는 판자촌이었다. 그래도 나는 아주 조그마한 마당이 있다는 사실 하나로 만족했다. 담벼락에는 꽃을 심고 문과 우체통을 페인트로 칠하며 나의 첫 독립생활이 시작됐다. 집 근처에는 자그마한 빵집이 하나 있었다. 어느 날 내가 학교 잠바를 입고 간 날, 아주머니께서 기특하다며 빵을 몇 봉지 담아주시더니 부모님도 갖다 드리라고 하셨다. 혼자 살고 있다 답한 내게 두어 봉지를 더 챙겨주시던 그녀는 그 뒤로도 내가 갈 때마다 자꾸만 빵을 더 주셨다. 성인이 되자마자 나는 갑작스레 사회에 던져졌고 막막한 일 투성이었다. 그때마다 누군가 한 명씩은 나타나 내게 도움을 주곤 했다. 마치 어디선가 도움을 청하는 걸 기다렸던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내게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았고 나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도움을 주고는 그것으로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이 나의 책가방을 빵으로 가득 채워주었듯이 나 또한 다른 이의 가방을 채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한 행위는 돌고 돌며 세상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망상을 함께하며.
카페제인에서 가장 좋아했던 두 메뉴. 딸기 케이크와 크림드에펠이다. 둘 다 사장님께서 직접 만드신 메뉴였는데 나는 당시 밥대신에 케이크를 먹으러 왔을 정도로 딸기 케이크에 푹 빠져있었다. 크림드 에펠은 아인슈페너와 유사했지만 크림이 더 달고 진했다. 에스프레소가 꽤 많이 들어갔던 걸로 기억한다. 피곤한 날에 한 모금을 넘기면 그만한 피로회복제가 없었으니까. 제인이 문을 닫기 직전까지 나는 주에 2,3 번은 그곳에 들렀다. 영수증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수업 과제를 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사장님과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나이를 먹어가는 것에 큰 미련은 없지만 내가 머무르고 쉴 수 있던 공간들이 하나 둘 사라지는 걸 볼 때마다 아쉽고 그리운 마음이다. 국어사전에 나오는 공간의 첫 번째 뜻은 ‘아무것도 없는 빈 곳’이다. 아무것도 없기에 무엇이든 들어차고 언제든지 떠나간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잠깐의 빈칸의 연속을 우리는 공간이라 부른다. 공간은 서울의 2호선처럼 끝없이 순환하며 비어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더욱 그 이별이 공허하고 차가운 것일지도 모른다.
최근에 엔트러사이트 한남점이 문을 닫았다. 마지막날 열린 굿바이 파티에 가고 싶었으나 출강하는 날이라 아쉽게 참여하지 못했다. 이렇게 보니 처음 이곳에 발을 들이게 된 지 벌써 9년이 지났다. 보통의 카페와는 달리 현관에는 사람들이 반려동물과 함께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2층 중앙에는 테이블 자리를 기꺼이 식물들에게 내주어 온갖 나무와 풀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늘 그림을 그리러 갔지만 결국 그곳을 그린 그림이 이 영수증 한 장뿐이다. 게다가 이와 같은 형식의 이미지는 9년간 거의 나온 적이 없다. 최근에 그렸던 수채 작업에서 이와 비슷한 방식의 그림을 그리게 됐는데 그 작업에도 나무가 가득했다. 어쩌면 나무만이 주는 특별한 인상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소리가 없지만 흙내음과 약간의 쌉싸름한 이파리 향과 함께 덥수룩한 녹색의 군락으로 오랫동안 존재했다. 그곳에만 담기는 이야기와 얼굴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