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이라는 목적지를 향해서
샤로수길이라는 단어가 이때쯤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 첫 단추를 꿴 집이 저니가 아닐까 싶다. 대학교에 입학할 당시에는 가게들이 지금처럼 즐비해있지 않았고 사장님들 각자의 개성이 드러나는 가게들이 드문드문 있었다. 그중에서 특히 저니의 버거는 육즙이 가득한 패티와 따끈하고 살짝 바삭한 번의 조합이 일품이었고 프랜차이즈 이외의 버거를 먹어본 적 없는 나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하루는 친구와 버거를 먹다가 가게 이름이 왜 Journey(여행)인지에 대해 추측해 보았다. 벽에는 사장님께서 호주에 살던 시절 찍었던 사진들이 있었고 친구는 사장님이 여행하는 걸 많이 즐기는 것 같다며 우리도 여행을 가야겠다고 갑작스러운 포부를 밝혔다. 나는 그런 친구의 느닷없음이 싫지 않았기에 우리는 그 해 여름 하와이로 향했다. 16년 영국에 이어서 17년에는 고모가 살고 계신 하와이까지. 나는 그때부터 매년 여행을 가기 시작했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었고 장학재단에서 주는 생활비가 제법 되었기에 나는 그 생활비를 여행비로 탕진하기로 했다. 그것을 모아 졸업 이후 무언가를 할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 나에게는 졸업 이후에 펼쳐질 불확실의 바다보다 학생이 아니면 떠날 수 없는 시간과 경험이 더 값지다고 느껴졌다. 만약 그러지 않았더라면 일생에 유일한 후회로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그 이후로 나는 방학이면 제각기의 세상에 닿는 불시착을 즐겼다. 그곳이 낯선지 익숙한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매일의 챗바퀴에서 한 두 바퀴만 나갔다 돌아올지언정 그것은 여행이라 부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기에. 그러다 보니 일상과 여행의 경계가 점차 흐려졌는지도 모른다. 나의 일상은 계획이라는 틀 안에 예측불허의 사건들이 가득했고, 나의 여행은 그 일상이 조금 더 색을 빛낼 뿐이었다. 어디에 있든지 무언가를 그리고, 부르며, 적었다. 휴가나 연휴에 무얼 할지 고민하는 사람들은 하루도 집에 있지 않는 내게 열심히 산다 말한다. 나는 그저 좋아하는 것을 매일 해야 하는, 욕심 가득한 방랑자일 뿐이다.
영수증에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는 이 드로잉북을 살 돈이 없어서였다. 브런치북 초장에 언급한 것처럼, 드로잉북을 사지 못한 날에 영수증에 한 낙서가 지금의 영수증 드로잉이 됐다. 한 번은 작가와의 대화에서 이와 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더 저렴한 드로잉북이나 종이도 있을 텐데 꼭 저 드로잉북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나요?”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입을 뗐다.
“음, 솔직히 그냥 저 드로잉북이 그릴 때 기분이 좋아서요. 종이도 두껍고 그 위에서 무슨 그림을 그려도 웬만해서는 종이가 버티더라고요. 그런 단단함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영수증은 반대로 한없이 얇고 잘 찢어져요. 아주 가볍게 낙서한 그림이 오히려 사람들이 더 좋아해 주시는 걸 보고 드로잉북을 고집했던 것이 조금 민망해지더라고요 스스로. “
여전히 영수증에 그림을 그리고 드로잉북도 같은 것을 사용하고 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나는 익숙함에 안정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단골 카페에 앉아 사장님과 담소를 종종 나누며, 늘 들고 다니는 필통과 드로잉북을 관성처럼 테이블에 펼친 후 주문한 라테를 기다리면서 담배를 무는 일. 나의 삶의 수단이 여행이라면 목적은 안정에 있었다.
개인전을 종종 열게 되면서 학교 밖에서 작가님이라는 호칭을 큐레이터들에게 부여받았다. 꽤나 무겁고 부담스러운 갑옷처럼 느껴졌지만 내심 기분은 좋았다. 담보 하나 없는 전과를 결심한 이후 내 손으로 일궈낸 작은 메달 같은 그 호칭은 소중하고 값졌으니까. 어린 나이에, 그리고 아직 대학도 졸업하지 않은 나를 작가님으로 부르는 사람들을 마주하며 나는 작가란 것에 걸맞기 위해 그럴싸한 이야기를 지어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만들어 낼 수 없었다. 나의 작업은 사회적 통념이나 이데올로기적 상념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그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청년의 치기 어린 붓질이 낭자한 습작과도 같은 것으로 작업을 바라보던 내게 세상은 급작스레 작가라는 포장지를 쥐어준 것이다. 재밌는 건 여전히 그 ‘걸맞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도통 모르겠다. 아직 배움과 작업의 양이 적은 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모르는 지점이 가득한 그림이기에 나는 붓을 놓지 못한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일본과 영국여행을 떠날 때 부모님께서 사주신 시계다. 2017년인 당시에 벌써 10년이 됐던 시계였지만 나는 그 낡음을 좋아했다. 스트랩의 고무는 눌리고 찢겼지만 문제없이 작동하는 시계를 바꿀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이 시계를 15년 정도 썼을 때 빈티지 마켓에서 새로운 시계를 보았다. 이후로는 몇 만 원 돈 안 되는 시계를 번갈아 쓰다가 지금은 2년 전에 정착한 시계를 매일 차고 있다. 흔히 우스갯소리로 남자가 자동차, 음향기기, 카메라, 그리고 시계에 빠지면 집안이 망한다는 얘기가 있다. 나는 공교롭게도 그 모든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의 사치는 값이 아닌 그들이 지닌 시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제조된 날이 오래된 물건일수록 지금은 찾을 수 없는 개성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불편함이 아닌 재미의 요소로 내게 다가왔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대부분의 물건들은 웬만큼의 기능을 하게 됐고 각 회사의 개성은 그 기술로 인해서 퇴색했다. 그래선지 조금은 불편한, 그리고 그것이 재밌고 특별한 옛날의 물건들에 자꾸 손이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멈추고 돌아볼 줄도 알아야 한다. 예전에 어딘가에서 본 글귀다. 멈추는 것이 무엇인지 잊은 지 오래다. 나는 늘 무언가를 손에 쥐고 있어야 했다. 붓, 연필, 책, 기타, 마이크, 자동차 핸들, 오토바이의 스로틀, 혹은 술잔 등, 참 여러 가지를 쥐고 살았다. 하나 확실한 것은 가만히 머무르는 쉼에 대해 잊었다는 것이다. 친구들과 휴가를 떠나면 보통 호텔이나 휴양지에서 빈손으로 돌아다니거나 한 곳에 머무르며 여유를 즐기기 마련이다. 그들 사이에서 나는 언제나처럼 드로잉북을 펼치거나 곡을 썼다. 그러나 그것이 열심히 하는 것과는 다른 양상이라고 생각한다. 친구들의 쉼에는 나의 움직임이 늘 병풍처럼 펼쳐졌을지도 모른다. 오래된 친구들은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었기에 별 개의치 않아 했지만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사이의 지인들은 나를 지독한 연습벌레로 오해하기도 했다. 무언가를 위해 달린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렇다고 멈추는 것이 도태되는 것이라 여기지도 않았다. 그저 몰아치는 생각의 이미지와 음표들의 나열이 눈앞에 펼쳐지지 않았을 때의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서, 나는 가방이 늘 무겁다.
어릴 적부터 동물을 좋아했던 나는 한때 수의사를 꿈꾸기도 했다. 그렇기에 유기견 센터의 문을 열기까지 조금 망설여졌던 것도 사실이다. 상처가 많은 아이들은 그만큼의 세심한 시선과 보살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고등학생 때 읽던 ‘동물과의 대화’라는 제목의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조금이나마 아이들의 마음을 열고 나의 말을 전하고 싶은 마음에서 책을 찬찬히 살피게 됐다. 이후 격주로 나간 유기견 보호 센터에는 점차 나를 기억하고 반기는 아이들이 생겼고 지킬이도 그중 하나였다. 책에서 인간의 시선으로 보려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했던가. 나는 생각보다 아이들과 사람의 대화를 나눈 적은 없다. 우리의 산책에는 말보다는 눈 맞춤이 잦았고 점점 그것에 익숙해지다 보니 아이들의 눈과 행동을 통해 선명하진 않지만 대강의 의사를 파악하게 됐다. 그리고 그 무형의 대화(이 또한 인간의 시점이 위주인 표현일지도 모른다.)가 주는 정적이 좋았다.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공백을 깨려 하는 대화보다는 정적의 감각을 읽어가는 대화가 보통의 대화이기를 바라는 마음도 들었으니까. 이때부터였던가, 나는 말이 부쩍 느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