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악역’의 반대말은 ‘선역’이 아닌 ‘주인공’이다. 애당초 주어진 역할은 선의 반대가 아닌 주인공, 즉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 되는 이의 반대의 길을 가는 이를 악역이라 칭한다. 바람이 꽤 차가워질 당시, 문득 나는 내가 그 악역이 된 기분이 들었다. 타인의 삶에 훼방을 놓고 무례한 부탁들을 늘어놓는, 힘도 없으면서 혀를 함부로 놀리곤 하는 비열한 역할의 악역이 있었다. 그는 늘 마왕을 꿈꿨는지도 모른다. 본인이 마치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듯이 원하는 대로 인생이 흘러갈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행동은 경솔했고 말은 가벼웠다. 때로는 그를 가리기 위한 장치들을 열심히 구축하여 모든 행위에 대한 이유들을 찾았다. 그 이듬해까지 그는 그렇게 잦은 실수들의 연속으로 많은 것을 잃었다. 그리고 그것이 본인의 행동으로 인한 당연한 결과였다는 걸 깨닫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수위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황지우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중에서
제목을 듣고 궁금해진 나는 서점에 가서 이 시집을 펼쳐보고는 그 싸늘하게 현실적인 문체에 반해 그 길로 계산대로 향했다. 나는 글을 읽을 때 아름다운 표현보다는 그것이 현실과 예리하게 맞닿아 있음을 보여주는 차가운 문체들을 좋아한다. 대표적으로 황인숙, 유진목, 황지우 등이 그러하며 지금에야 유명해진 한강 또한 그렇다. 당시 나의 작업노트는 뜨거웠다. 조금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감정에 호소하는 일기장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그림보다 앞서나가려는 성향이 강했고 나조차도 그에 매몰되어 내가 그려내는 것들보다 그것이 어떻게 보이는지, 글자들에 더 신경을 곤두세우기도 했다. 물론 두 가지 모두 작업에서 중요한 부분임에는 틀림없지만 나는 글이 그림을 이기려 드는 작업, 당시 나의 그러한 성향이 그리 성숙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날카로운 표현들을 찾아 나서게 됐다. 풍부하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아름다운 표현은 마치 놀이동산의 헬륨풍선처럼 즐비하지만 집에 돌아가는 길에 대부분 하늘로 날아가 버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풍선을 나눠주던 피에로의 하루는 현실이 강하게 짓누른다. 하루하루 풍선을 건네는 그는 화장을 지우고 가발을 벗으며 무섭도록 차가운 현실을 매일 마주하며 살아간다. 분장실의 피에로에게서 나는 내가 추구해야 할 온도를 찾았다. 각자의 풍선을 들고 가면을 쓴 우리는 애써 현실을 부정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는 화려한 헬륨풍선의 아름다움을 동경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반대로 그 차가운 그림자를 쫓기로 했다. 그로 인해 발현되는 빛의 형태를 통해서 우리는 실재하는 성질, 현실의 것들을 감각하게 될 테다. 차가운 그림자가 있어 우리는 태양의 온도를 여실히 느끼게 됐다.
성경에는 천사의 형태에 대한 묘사가 적혀있는데, 이는 우리가 상상한 아름다운 인간의 등 뒤에 날개를 단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나는 종교가 없기에 성경의 사실관계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 한 권의 책이 인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기에 두세 번 정독을 했었다. 그중에서 기억나는 것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특히 개신교에서 성경을 이미지화하는 것이 꽤나 독특한 방식을 가졌다는 걸 알게 됐다. 그중에 하나가 이 천사에 대한 이미지이다. 날개가 여러 개고 몸통이 없으며 수백 개의 눈알을 단 기상천외한 외형보다는 중세부터 내려온 미화된 하얀 피부의 천사가 더 사람들에게는 경외의 존재로 다가가기 쉬울 것이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은 만약 그 존재가 실재하며 모든 기록 또한 사실이라면, 어쩌면 사람마다 다른 모습의 천사를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각자의 머릿속에는 서로 다른 천사가 살고 있다. 누군가에게 천사는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일 것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강인하고 거대한 날개뿐인 비행물체에 가까운 외형이 될 수도 있다. 아마 그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 외형에 대한 사실관계가 아닌 개개인의 믿음에 있다. 당시 나는 무신론자와 교황의 책을 동시에 읽으면서 이 끝이 없는 조용한 전쟁에 대한 궁금증을 풀고자 애쓰던 때였다. 내가 내렸던 결론은 이 두 진영은 결코 화합할 수 없다. 아니 화합할 이유가 없을 테다. 서로를 회유하여 통합하는 것보다는 대립의 존재로서 각각의 입지가 단단해질 수밖에 없는 이 끝없는 흑과 백의 대립은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주인공과 악역, 빛과 그림자, 교황과 무신론자처럼 세상은 끝나지 않는 두 분단에 각각 놓여있다. 그리고 그 모양은 전쟁과 토론 사이를 수없이 넘나들고 있다.
눈을 뜨자마자 담배를 한 대 태운다. 몸을 씻고 바이크에 시동을 건다. 날이 부쩍 추워져서인지 유난히 시동이 걸리지 않는 아침이다. 학교에 도착하면 강의실에 가기 전 카페에 들러 따뜻한 라떼 한 잔을 시킨다. 그리고는 다시 담배를 한 대 태우고 강의실로 향한다. 아직 눈을 뜬 지 두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기에 뇌가 감각을 인지하는 데에 약간의 버퍼링이 존재한다. 그로 인해 감각할 수 있는 아침 햇살과 커피의 온도 그리고 담배의 향은 유난히 선명했다.
뭐가 그리 착잡했길래 빵 한 봉지를 한 번에 비웠을까. 사실 몇몇 영수증들에 대한 기억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서 흐려지는 것은 영수증의 글자만이 아니다. 당시에는 날카로웠던 감각들이 어느새 무뎌지고 더 이상 나의 하루를 방해하지 않게 됐다. 오래된 일기장을 볼 때마다 나는 과거의 나에게 수많은 물음표를 던지게 된다. 어떤 이유로 그러한 감정들을 느껴야만 했는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또 회귀하지만 이미 그것은 감열지의 인쇄된 검은 잉크처럼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여전히 나는 작은 것들을 예민하게 감각하지만 그 반응의 크기가 확연히 줄었다.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한 풀은 작은 상처에도 쉽게 시들고 꺾이기 마련이다. 어쩌면 나는 이제야 껍질이라 부를만한 것을 갖춘 나무의 시작점에 서게 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그것이 왜 이제야 온 것인지에 대한 갈 곳 없는 원망을 품어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선명하게 남은 것이 그림이다. 그림은 그 의미와는 상관없이 자신만의 형상으로 남아 기억의 실마리와 함께, 그때의 손끝에 닿은 감각을 온전히 보존하고 전달한다. 오래된 그림은 어린 시절 발가벗은 모습이 담긴 사진과도 같다. 그것은 분명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나이기에 온전히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여전히 나일 수밖에 없는 부끄러운 초상이다.
형형색색으로 냉동건조된 꽃다발을 파는 자판기가 이제는 길거리에 만연하다. 선물이랍시고 건넨 꽃다발이 금세 시들게 되는 것이 물론 아쉬울 테다. 하지만 꽃은 시들기에 사랑을 표현함에 적합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불변‘이라는 것은 판타지에 가깝다. 그것은 마치 별처럼 영원히 닿을 수 없지만 손에 잡힐 것만 같은 아슬함에 아름다움을 느끼게 만들곤 한다. 그리고 그에 닿기 위해 애쓰는 손짓이 바로 사랑이기에, 사랑은 늘 애달프고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