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떠난 첫 해외여행
이모는 숙식은 알아서 해줄 테니 일단 영국으로 오라고 하셨다. 하지만 대학생이던 내게 영국행 항공권은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이었기에 약소한 저축으로는 어림도 없을 판국이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때 연이 닿았던 장학재단에서 한 통의 연락을 받았는데, 대학생에게도 적용이 되는 장학금이 있으니 한 번 신청해 보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곧바로 오디션을 보러 갔고 운이 좋게도 장학생에 선발되어 생활비와 함께 학비걱정을 덜게 됐다. 넉넉지는 않았지만 학생 치고는 꽤나 큰돈이 생기니 영국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이제 드디어 가볼 수 있겠다는 생각. 어릴 적 집이 기울기 전, 아버지가 보내주셨던 런던 갤러리 투어를 이제 혼자 다시 돌아보기로 했다.
역시나 여전히 영국인들은 친절했다. 사실은 그들의 호의는 진실과는 거리가 멀 때가 많다는 걸 지금은 안다. 하지만 어린 나이였던 내게 그들의 미소는 꽤나 가슴 뛰는 여행의 시작을 두드렸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사실 중요하지는 않았다.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나는 ‘좋은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흔히 그 나이 또래에서 볼 수 있는 철없는 모습을 꽁꽁 숨기며 가면을 쓰고 살았다. 그때의 분명 친구들은 나를 성실한 모범생으로 기억할 것이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중요하지 않았다. 매일 들르던 카페 직원의 일정한 길이의 미소처럼, 적당한 가면이 때로는 우리에게 필요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운이 좋게도 데이비드 호크니의 개인전을 보러 갔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언젠가는 꼭 그의 그림을 눈에 직접 담고 싶었는데 마침 그의 초상화 전시가 RA에서 열렸다. 내가 가고 싶은 학교에서 열리는 좋아하는 작가의 전시. 이미 그것으로 내 발걸음의 무게를 덜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그날, 나는 디자이너가 아닌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림을 보면서 소름이 끼쳐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안다. 눈앞에 놓인 그림의 의미가 어떤지, 시대적 배경이나 그 이야기와 무관하게 시각적인 자극 만으로도 우리는 동요를 끌어안을 수 있다는 것을. 전시장에 머문 지 3시간이 훌쩍 넘었지만 나는 같은 곳을 맴맴 돌며 그 동요를 한참 동안 즐겼다. 아직까지도 그때의 동요를 뛰어넘는 작업은 보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다시는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디자이너와 화가라는 두 갈래길에서 고민하던 나는 이제 없으니. 어릴 적부터 나는 자동차를 그 무엇보다도 좋아했고 그림과 그것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직업인 디자이너로 자연스레 지향점을 두고 있었다. 어느 교수님의 랩에서 인턴을 하던 중 들었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너는 내가 젊을 때 배우던 미래지향적 이미지를 어떻게 알고 그리는 거냐?”
약간의 농담과 핀잔이 섞인 교수님의 말. 그러나 나는 그게 좋았다.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됐고 호크니의 초상 앞에서 나는 결심하게 된다. 나의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시대적 흐름과 역행하는 취향을 추구할 거라면 그게 맞겠다. 2025년 지금 나의 차는 터치 스크린 대신에 CD플레이어와 바늘 계기판이 자리 잡고 있다. 가끔 친구들이 묻는다. 작가가 되기로 한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고, 혹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 재미없던 적은 없었냐고. 나는 여행에서 돌아와서 과를 바꾼 후로 내 그림이 지겹거나 나의 선택을 되돌리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물론 내가 좋은 그림을 그리는 작가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저 습관처럼 매일 붓을 집어들 뿐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즐거우면 되는 나였다.
해저터널은 공상과학 영화에서만 보던 것인지라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무미건조한 성격의 이모부가 그런 여행을 제안한 것 또한 비슷한 맥락으로 그다지 현실적이지 못했다. 영국에서 차에 탑승한 채로 기차를 탔고, 프랑스 땅 위로 올라와 차를 내렸다. 벨기에는 프랑스를 가로질러가야 했기에 이모부는 이 여행은 프랑스도 포함인 패키지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그 미적지근한 농담을 한 귀로 흘려보내며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바빴지만. 벨기에에 도착한 우리는 작은 달리 갤러리에 들렀다. 흔히 알려진 달리의 페인팅은 없었고 그보다 훨씬 작고 가벼운 드로잉이 주를 이뤘다. 드로잉은 뜨문뜨문 써놓은 다이어리와도 같다. 불완전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솔직한 면이 있다고 해야 하나. 달리의 산발적인 일상의 나열은 그의 그림에 고스란히 담겨있었고 정리된 것 하나 없는 그것이 좋았다.
하루는 카페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 구겨버렸다. 오래전 나의 은사님께서 그림은 함부로 버리는 것이 아니라고 내게 말씀하셨던 게 생각이나 죄책감이 밀려왔다. 나는 구긴 손을 쉽게 휴지통에 가져갈 수 없어 그냥 구겨진 채로 테이블에 잠시 두었다. 그러자 옆자리에 앉은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내게 물었다.
“그림을 버리려 하셨나요? 왜요? 너무 멋지던데요?”
그 말을 내뱉으면서 여자는 구겨진 종이를 천천히 펴서 내 드로잉북 위에 조심스레 올려두었다.
“다시 자세히 보세요. 예쁘지 않나요? 저는 아까 보면서 영수증 위에 그림을 올리는 것이 참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일기 같기도 하고, 뭔가 갤러리에 없을 것 같잖아요.”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녀의 말에 동의할 수가 없다. 정확히 얘기하면 반만 동의한다고 해야 할까.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날의 이야기가 소중하게 담겨버린 드로잉이다.
이모와 중고물품들이 가득한 샵에 들렀다. 나는 언젠가부터(아마 홍대에 자주 들락거릴 때인가 보다) 새것보다는 낡은 것이 좋았다. 부끄럽지만 그것이 유의미하게 저렴한 가격을 내보였기에 그 당시 지갑이 가벼웠던 나는 점점 새 상품에 거리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 날은 날깃거리는 남방 하나를 집었다. 15파운드(한화로 약 2만 5천 원) 정도의 옷을 사는데 한참을 고민하자 이모는 조카가 궁상떠는 건 못 본다며 냅다 집어 계산대로 가져갔다. 그렇게 반강제로 나는 그 옷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9년째 내 옷장 한편에 자리를 차지하는 중이다. 그날의 영수증은 붉었다. 영수증이 붉다니. 직원에게 영수증을 건네받고 나는 한참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늘 하얀 바탕에 글씨를 기대하던 내게 느닷없는 강렬한 붉은색이 들이닥쳤다. 결국 아무것도 그릴 수가 없어서, 손을 델 엄두가 나지 않아 그대로 두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은 왠지 모르게 그대로 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