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3
모차르트와 그의 아버지 레오폴드의 서신을 읽는 중이다.
1778년 모차르트는 만하임을 지나 파리에 머물면서 직장을 구하고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에 이어 자신까지도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하인으로 교회음악가로 고용되어 있었지만, 모차르트의 말에 의하면 잘츠부르크는 “음악을 하는 사람이 존경 받지 못하고, 아무것도 들을 게 없는” 곳이었다. 부연하면 대주교의 지붕아래서는 모차르트와 같은 천재 음악가나 요리하는 하인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당대 최고의 음악과 예술의 중심지였던 만하임에 비하면 잘츠부르크에서는 그의 귀를 자극할 만한 음악적 이벤트가 거의 없었다. 당시 만하임 오케스트라는 오늘날로 치면 베를린 필과 같은 국제적 위상의 오케스트라로 최고 수준의 연주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모차르트에게 자신을 인정하지도 않고, 자신이 성장할 만한 토양을 제공하지도 못했던 잘츠부르크를 벗어나 만하임이나 파리 같은 예술 중심지로 옮기고 싶은 욕구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새로운 직장을 찾기 위해 1777-1779년까지 뮌헨, 아우구스부르크와 만하임, 파리로 이어지는 긴 구직 여행을 떠난다. 이미 6,7세부터 유럽의 주요 왕실에서 꼬마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던 그였다. 스물이 갓 넘은 나이지만, 아직 그의 이름과 반짝이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왕족이나 성직자들 중 그의 후원자로 선뜻 나설 이들을 반드시 만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구직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버지인 레오폴드 모차르트는 구직을 하러 떠났으나 일년 넘게 아무런 성과가 없는 아들에게 점점 조바심이 났을 것이다. 1778년 8월 13일, 아들에게 보내는 걱정 어린 편지에서 아버지는 그림 남작 (멜히오르 폰 그림 남작은 파리의 후원자로, 모차르트에게 돈을 빌려주고 구직을 위해 높은 사람들을 소개시켜 주기도 했다)이 쓴 편지를 인용하는데, 그 대목이 흥미롭다.
“그 사람(모차르트)은 너무 사람이 좋고, 그리 활동적이 아니며, 너무나 함정에 빠지기 쉽고, 행운으로 이끌어 줄 만한 수단에는 무신경합니다. 이곳에서 두각을 드러낼 의지가 있다면, 약삭빠르고 적극적이면서 대담해야 합니다. 그가 행운을 붙잡으려면 재능은 그 반 정도로 족하고 악착같은 성품이 갑절이나 필요합니다.”
당시 폰 그림 남작은 이런 소리를 모차르트 부자에게 주절거릴 수 있을 만큼 예술에 대한 조예가 깊고, 경제적 사회적 영향력도 막강한 인물이었을 것이나, 200여년 후의 우리가 보기에는 정말 누가 누구를 평가하고 걱정하는 것인지…… 기가 막힐 따름이다. 모차르트에게 대고 ‘너가 재능 있는 것은 알지만, 너의 재능은 반 정도 밖에 필요가 없다. 살아남으려면 더 약고 악착스러워야 한다.’라는 말을 서슴지 않았던 그가, 모차르트의 음악이 230년이 지난 지금 전세계에서 이런 인정을 받고 있다는 역사를 알게 된다면 자신이 내뱉은 말들에 진심으로 부끄러워할 것 같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림 남작의 주옥 같은 대사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며 맹위를 떨치고 있다. 귀국을 하고 한국 사회에서 다시 적응하면서 내가 가장 많이 들은 조언은 놀랍게도 폰 그림 백작의 조언과 거의 토시까지 같다. 그리고 나도 이런 류의 이야기를 주절거리는 꼰대 반열에 들어서고 있다.
폰 그림 남작은 여러 정황을 고려할 때 아들이 파리에서 성공하기는 매우 어려워 보인다는 직언을 레오폴드에게 전했다. 그리고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모차르트는 결국 구직에 실패하고 하는 수없이 패전병처럼 잘츠부르크로 돌아갔다.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 K. 302를 듣고 있다. 녹록지 않은 구직, 이에 대한 아버지의 실망감, 우호적일 줄 알았으나 그에게서 등을 돌리는 귀족들…… 그는 이 상황에도 자신의 능력에 대한 불신이 전혀 없었을까? 그는 너무 사람이 좋고 성공에 대한 악착 같은 성품이 부족하다…… 모차르트는 이 평가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