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에 사이공 모린 & 푸켓타운 더메모리엣온온 & 달랏 뒤파크
시간이라는 마법이 더해지지 않으면 불가능한, 오직 세월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건 참 근사한 일이다. 그런 것들에는 인위적으로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아우라가 풍긴다. 못 만들어 내는 것이 없는 세상인데 이상하다. 아무리 빈티지처럼 만들어 놔도 진짜 빈티지와는 미묘하게 다르니 말이다.
낡은 노포나 오래된 호텔 안에는 시간이 고여있는 것만 같다. 고요한 호수처럼 부드럽게 찰랑이고 있던 시간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작은 파도처럼 일어나 내 발을 기분 좋게 적셔준다. 나이 안에 삶의 지혜를 차곡차곡 쌓아 둔 노인이 시간의 나이테를 닮은 주름 가득한 미소로 나를 안아주는 것만 같다.
게스트하우스 같은 저렴한 숙소를 주로 다니지만 아주 가끔은 그런 시간의 방들로 여행을 떠난다. 아주 오래 그 자리에서 그 도시를 지켜봐 온 호텔에 도착해 체크인 카운터 앞에 설 때면 과거로 입국하기 위한 수속을 받는 것 같아 두근두근 심장이 뛴다.
1901년 지어진 사이공 모린(Sài Gòn Morin) 호텔은 베트남 후에(Huế)에 있다. 찻길 하나만 건너면 흐엉(Hương) 강이, 그 강을 가로지르는 쯔엉 띠엔(Trường Tiền) 철교가 나온다. 사이공 모린보다 일 년 먼저 지어진 철교를 건너면 후에에서 가장 큰 동바(Đông Ba) 시장이고 거기서 얼마 안 가면 금세 옛 왕궁까지 닿는다. 이런 멋진 위치라니 아마 후에의 호텔 중 최고가 아닐까 싶다. 요즘 생긴 최고급 호텔도 가질 수 없는 이 전망과 위치는 아마도 후에 최초의 호텔이기에 차지할 수 있었으리라. 가슴이 탁 트이는 전망은 사이공 모린에서 밖으로 나올 때마다 매번 새로 감탄하게 한다.
사이공 모린에서 나는 강과 철교, 강변 공원이 훤히 내다보이는 이층 방에 묵었다. 별다른 꾸밈이 없는 방은 너무 넓어서 조금 썰렁하기까지 하다. 여행할 때 대부분은 작은 숙소를 이용해서 그런지 유난히 넓은 방은 낯설기도 했다. 가구는 아주 묵직해 보이는 책상과 의자, 차를 마시는 공간에 놓아둔 긴 의자와 탁자뿐이라 공간의 여백이 많고 모두 나무로 만들어 따뜻하고도 차분한 느낌을 준다. 발코니로 나가는 커다란 문도 나무로 만들어져 객실 안은 혹시 백 년 전 모습 그대로인가 착각에 빠지게 한다. 새것으로 보이는 물건들은 없고 시설은 낡았고 에어컨은 약해서 바람이 탈탈탈 나왔지만 그곳에 묵는 동안 나는 그저 좋았다.
차선 하나는 될 만큼 넓은 옛날식 복도를 걸어 100년 된 아몬드 나무와 인디언 나무가 있는 뒤뜰로 나간다. 맑은 날에는 호텔 건물만큼 나이 든 두 그루 나무가 만들어주는 넓고 푸근한 그늘에서 어떤 음악 소리보다 듣기 좋은 새소리를 배경으로 아침을 먹었다. 어느 저녁에는 정말 세상에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소리의 근원지를 한참 찾아보니 두꺼비였다. 우리나라 두꺼비도 그렇게 우는가. 무지하게 크고 코믹한 소리가 나를 풋, 웃게 했다.(혹시 사이공 모린에 가신다면 두 마리 다정한 두꺼비들을 찾아보세요. 아, 굳이 찾지 않아도 두꺼비들이 먼저 큰 소리로 부르겠네요.)
뒤편에 있는 건물에는 오랜 세월을 지나오는 동안에도 그대로 보존해 온 나무 계단의 일부가 남아 있다. 수많은 이들의 발걸음에 닳은 나무 계단, 나는 천천히 과거의 시간을 밟아 올라갔다. 그렇게 올라간 이층 어느 방 옆에서 채플린이 묵었다는 사인을 발견했다. 1936년 4월, 그해면 그 유명한 <모던 타임즈>를 발표한 해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을 남긴 그는 사이공 모린에서 행복했을까. 사진 속에서 환하게 미소 짓는 채플린. 아, 허니문 여행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다.(별 걱정을 다했습니다. 그는 사이공 모린에서 저보다 훨씬 훨씬 더 행복했겠네요.)
아직 해가 뜨기 전, 흐엉 강이 보이는 작은 발코니로 나간다. 강변 공원은 벌써 운동 나온 동네 사람들로 붐빈다. 후에의 하루가 시작됐다. 비가 살짝 흩뿌리는데 사람들이 저리 많은 건 곧 그칠 거라는 얘기다. 나는 운동화를 신고 끈을 조이고 호텔을 나섰다. 후에의 현재의 시간을 천천히 오래오래 걸었다. 사이공 모린이 지난 124년간 바라봤을 흐엉 강이 '삶은 이렇게 흐르고 있어요',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태국 푸켓타운에 있는 더메모리엣온온 호텔은 1927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푸켓의 바다와 근처의 다른 섬들을 보러 간 여행이라 푸켓타운에는 들를 이유가 없었는데 굳이 타운까지 간 이유는 이 호텔이 있어서였다. 중국-포르투갈 스타일로 지어졌다는 것, 말레이시아 페낭의 장인들이 설계하고 만들었다는 것, 2000년에 만들어진 영화 <비치>(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배경이 되었다는 얘기들이 더메모리엣온온에 대한 궁금증을 자꾸 더 키웠다.
독립적인 건물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호텔은 양 옆으로 다른 건물과 붙어 있었다. 하얀색 페인트로 깨끗하게 칠을 했지만 오래된 시간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외관만으로도 벌써 기대감으로 가득 찬 나는 아치 문을 아주 천천히 통과해 안으로 들어갔다. 오른쪽에는 고풍스러운 리셉션이 있고 왼쪽이 로비인데 고가구들이 칠을 안 한 낡은 벽과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풍긴다. 입구에서 봤을 때는 규모가 작게 느껴졌는데 뒤로 길게 공간이 이어진다. 리셉션, 로비 뒤로 객실도 보였다. 체크인을 마치고 건네받은 키는 전자식이 아닌 옛날 열쇠였다. 그렇지. 시간의 방을 여는 데는 이런 열쇠가 제격이다. 내 방은 2층. 나는 나무 계단을 따라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의 눈길이 바빠진다. 낡은 그대로 최대한 두고 꾸민 공간들은 어디로 시선을 옮겨도 멋있다,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건물의 가운데가 뚫려 있어 파란 하늘이 그대로 내부로 들어와 2층 전체가 환하다. 실외의 빛과 공기가 고스란히 느껴지니 꼭 햇빛 잘 드는 마당에 서 있는 것 같다. 연한 하늘색으로 칠한 덧문들과 천장에서 돌아가는 나무로 된 팬, 발을 옮길 때마다 삐걱 소리가 나는 마룻바닥. 사진을 잘 안 찍는 나인데 이쪽저쪽 카메라를 들이대고 셔터를 누르고 또 누르고 있다.
미로 같은 구조도 재미있다. 내 방은 올라오자마자 바로 찾았지만 다른 객실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게 다일 리가 없는데 이상하다 싶어 문 하나를 열었다. 객실들이 거기에 숨어 있었다. 객실 복도를 따라 끝까지 걸어가니 또 하나의 문이 나타난다. 커튼을 사이에 두고 나뉜 아늑한 공간이다. 커튼 안쪽에는 투숙객들을 위해 준비해 둔 푸켓 전통과자와 차가 있고 바깥에는 식탁들이 놓여 있다. 나는 접시에 과자를 담아 중정을 향한 창쪽 테이블에 앉았다. 늦은 오후, 푸켓의 옛날 과자를 먹는 귀한 시간이 천천히 구름처럼 흘러갔다. 그 자리에서도 하늘이 두 눈 가득 담겼다. 'ㅁ'자 두 개를 붙인 듯 중정이 두 개로 연결된 독특한 구조가 그제야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렇게 호텔 구석구석을 여행하다 보면 밖으로 나가고 싶은 생각이 안 든다. 포르투갈식 빌라들이 남아있다는 거리도 가봐야 할 텐데, 근처에 유명한 맛집들이 많다는데 나는 계속 호텔 안을 서성였다. 방 안을, 방 앞에 있는 응접 공간을, 로비를, 티룸을 오갔다. 그러면서 묘한 기분에 빠졌다. 이상하게 누군가 찾아올 것 같은 그런 기분이 자꾸 드는 것이다. 어떤 중요한 전갈을 가지고 누군가 나를 만나러 올 것만 같은... 푸켓은 한때 유럽 상인들의 무역항이었고, 호텔이 세워진 시기에는 주석광산산업이 활발한 때여서 많은 중국 노동자들이 이주했다고 한다. 그런 역사 속에서 더메모리엣온온이 탄생되어서일까. 마치 나는 이곳에 무역 거래를 위해 비즈니스 파트너를 만나러 온 것만 같았다.
더메모리엣온온에는 두 번 갔다. 이틀씩 묵었는데 손님이 많아 두 번 다 방을 옮겨야 했다. 짐을 풀었다가 다시 싸는 게 귀찮기는커녕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도로 쪽을 면한 방도, 창문이 중정을 향해 난 방도, 침대 하나로 꽉 차는 좁은 방도 다 좋았다. 방마다 색과 분위기가 조금씩 달랐지만 기품 있고 차분하고 따뜻한 느낌은 어느 방이나 똑같았다.
베트남 달랏의 뒤파크 호텔은 1901년생인 사이공 모린 호텔보다는 좀 ‘젊다'. 1932년에 문을 열었으니 93살. 124살 노인이 93살 노인에게 '아구, 자네는 아직 팔팔하구먼'하는 상상을 하니 웃음이 난다.
달랏. 프랑스 식민지 시기 프랑스인들의 휴양을 위해 만들어진 도시는 독립과 통일 후에는 베트남 사람들이 꼭 가고 싶어 하는 신혼여행지였다가 이제는 전 세계인들이 찾는 여행지가 되었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도시가 많고 많을 것이고 사람마다 마음에 품고 있는 도시도 다 다를 텐데, 내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는 달랏이다. 2001년 처음 가봤을 때부터 매혹당한 후 한 번도 순위가 바뀌지 않았다. 달랏에만 가면 여행을 멈추고 싶어졌다. 여행의 무거운 짐을 다 풀고 그곳에 살고 싶어졌다. 내게는 한없이 멋진 그 도시에 멋진 뒤파크 호텔이 있다. 이름이 여러 번 바뀌었지만 호텔의 모습도 로비에 있는 근사한 엘리베이터도 언제나 그대로다. 철문을 손으로 닫아야 올라가는 아주 오래된 엘리베이터. 탔다가 내릴 때 문을 꽉 닫아주지 않으면 멈춰 있어 로비에서 하염없이 기다릴 때도 있는 반자동 반수동 엘리베이터를 탈 때면 옛날 영화 속으로 들어온 것만 같다. 가끔 고장이 나서 계단으로 올라가야 하지만 걱정은 안 해도 된다. 호텔은 4층밖에 안 되니 걸어 올라가도 가뿐한 높이다.
호텔이 언덕에 있어 방이 어느 쪽을 향해도 풍경이 좋지만 뒤쪽 편에 있는 방에 묵으면 달랏의 아름다운 동네들을 구경할 수 있다. 진한 체리빛의 나무 바닥과 고풍스러운 창문이 매력적인 작은 방에 도착해 구멍이 네다섯 개쯤 뚫린 옛날식 쇠걸쇠로 창문을 받쳐서 열어두고 맞는 달랏의 저녁은 정말 근사하다. 넓은 창틀에 걸터앉아 제비가 울며 허공을 자유롭게 가로지르며 날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꼼짝없이 짙푸른 밤이 올 때까지 있게 된다.
뒤파크 호텔에는 에어컨이 없다. 아침저녁으로는 에어컨 생각조차도 안나는 달랏의 멋진 날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이 멋진 창을 열라고 일부러 그런 것만 같다. 한낮의 창문이 고원의 바람을 데려다준다. 아무리 더운 낮 시간에도 방에 들어와 창을 밖으로 열어젖히면 나무 냄새를 머금은 상쾌하고 산뜻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만으로도 행복해지니 뒤파크의 창문은 오래된 엘리베이터만큼이나 뒤파크의 명물이다.
달랏에는 뒤파크 호텔보다 앞서 1922년에 문을 연 팔레스 호텔도 있지만 가격이 부담되어 아직 못 가봤다. 언젠가 더 나이 들면 아주 특별한 날에 한 번쯤 묵을까 생각도 해보지만 나는 방이 아담하고 멋진 창이 있고 옛날식 엘리베이터가 있는 뒤파크 호텔만으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