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 카오산 로드에 처음 갔을 때 내 나이는 삼십 대 초반이었다. <On the Road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이라는 책을 보고 난 뒤 나는 카오산에 가보지도 않았으면서 카오산에 빠졌다. 카오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여행자 같았다. 그곳에 가면 나도 그 책 속에 등장하는 이들처럼 자유롭고 용감하게 나만의 삶을 살게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몇 년 후 드디어 나는 배낭여행자들의 천국이라는 그곳에 도착했다. 하나같이 여행 고수의 분위기를 풍기는 여행자들, 골목골목의 상점과 식당, 넘쳐나는 길거리 음식들, 밤거리의 음악 소리. 모든 게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때 나는 들떠 있었을 뿐 그곳과 잘 어울리지 못했던 것 같다. 카오산의 강렬한 에너지가 어쩐지 조금 부담스럽고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했다. 소란하게 북적이는 밤이 오면 주눅이 들어 카오산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명색이 여행자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처음 여행을 시작한 그때 나는 내가 어떤 여행을 좋아하는지도 모르는 채 여행을 했다. 그저 새로운 세상으로 떠나는 것이 좋았던, 다른 이들의 여행을 따라 하기만 했던 초보 여행자였다.
그래도 카오산에 갔다. 숙소값이 싸고 다른 도시로 이동하기가 편리해 안 갈 수 없었다. 대신 카오산 중심에서 조금 비껴 나 있는 곳들을 보기 시작했다. 그곳에 숙소를 구해놓고 카오산까지 좀 멀어도 걸어 다녔다. 그렇게 거리를 두고 나니, 여행자들보다 현지인들이 더 많이 보이는 곳에 가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동네가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하루는 이른 아침 산책을 나섰다. 여행 기념품이 아닌 생활용품을 파는 상점들과 청소 중인 사원들. 처음 보는 열대의 꽃들이 피어 있는 공원. 이른 아침부터 학교 행사가 있는지 깃발을 들고 행진하는 아이들. 수로 옆에 서는 작은 아침 시장. 그런 정겨운 풍경들이 자꾸 더 멀리까지 가보고 싶게 했다. 그리고 그날의 산책의 끝에, 어느 사거리 모퉁이에서 이 집을 만났다.
앞에 고가도로가 지나가고 도로보다 한 계단쯤 아래에 있는 가게는 실내가 조금 어두웠다. 아침부터 내리쬐는 뜨거운 태양에 그늘이 더 짙어져 그랬는지 모른다. 나는 잠시 그 어둠에 적응하려고 길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바로 그 공간에 매혹되어 버렸다. 나는 괜히 발을 높이 들어 가게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금 하나로 표시된 국경을 넘어 다른 도시로 들어가는 것처럼 사뿐히 문턱을 넘었다.
접고 펴지는 쇠창살문이 한쪽으로 접혀 있을 뿐 출입문은 따로 없다. 사람이 앉고 또 앉아 반질반질해진 동그란 의자들. 매일 닦아줘 빛나는 오래된 마루처럼 반지르르 윤이 나는 테이블과 이것저것 잡화를 보관해 둔 짙은 갈색의 가구들. 천장에서 돌아가고 있는 팬 소리와 옆 테이블 사람들의 대화 소리. 그릇 부딪히는 소리와 간간이 커피 내리는 소리. 오토바이와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 아침 운동 후 바로 들러 운동복 차림인 사람들, 출근 전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는 사람들. 내가 보고 싶었던 풍경들이 거기에 다 있었다.
한 테이블에 모여 앉은 사람들이 뒤늦게 온 일행을 반갑게 맞아준다. 들어오면서 손을 모으고 '사와디캅', 하며 자리에 앉는 사람의 인사가 아침 바람처럼 곱고 부드럽다. 태국 여행을 하며 수십 번 듣고 말했던 그 인사말이 특별한 축복의 말처럼 느껴졌다.
그 테이블에서 빠텅코(주로 두유에 적셔먹는 도넛. 아침 식사로 많이 먹는다.)를 먹고 있길래 주문을 했더니 테이블에 있던 한 분이 그 가게에서 팔지 않는 메뉴라고 알려준다. 그러면서 자기가 이 가게의 주인이라고 소개를 하며 빠텅코 하나를 냉큼 짚어 건넨다. 외부음식은 못 먹게 하는 게 보통인데 누군가 사 온 음식도 아무렇지 않은, 매상 같은 건 신경도 안 쓰는 주인과 손님으로 온 친구들. 주인은 그 테이블에 오래 눌러앉아 오랫동안 수다를 나눈다.
그 집의 주메뉴는 따로 있었다. 단맛 나는 소시지를 끼운 작은 빵과 계란프라이 위에 소시지를 얹은 까이까따(카이끄라타)와 커피. 까이까따, 뭔가 근사한 이국의 음식 이름을 잊지 않으려고 열 번쯤 되뇌었을 때 커피가 나왔다. 쟁반이 꽉 찼다. 아무 장식 없는 하얀 잔에 담긴 커피와 손잡기가 달린 연유 종지, 입가심용 차가 담긴 찻주전자와 도자기 잔까지 더 바랄 게 없는 완벽한 커피 플레이트였다.
어느새 시간이 흐르고 아침 해가 제법 깊게 가게 안으로 들어와 가게 안도 제법 밝아졌을 무렵이 되자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섰다. 각자의 볼일을 위해 떠나는 사람들의 표정이 말을 한다. 오늘 하루 잘 살고 내일 아침에 또 만나세,라고. 매일을 함께하며 서로의 하루의 시작을 바라봐주는 관계. 그들은 그렇게 각자의 하루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 펼쳐도 여전히 가슴 뛰게 하는 책 <On the Road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이 나온 지 거의 20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 책에 등장했던 여행자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 멋진 여행자들은 카오산을 떠났을까. 여전히 카오산을 사랑할까. 지금쯤 자신의 꿈을 이루었을까. 그들 같은 여행자가 되고 싶어 카오산으로 갔던 나도 어느새 오십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카오산에 간다. 그날 그 모퉁이에서 행복한 아침 하나를 발견한 후로는 카오산이 진심으로 좋아졌다. 어디를 가도 그 안에는 분명 내가 보고 싶은 삶의 소박한 행복들이 숨어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런 작은 행복들을 발견하기 위해 나는 아직 여행 중이다.
P.S. 이 아침 식당 겸 카페 이름은 Hia Tai Kee이다. 1952년에 문을 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