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만난 특별한 분보
제주공항에 내리자마자 나는 곧바로 제주시외버스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탄다. 터미널 건너편 어느 골목에 있는 <남원식당>에 가기 위해서다. 벌써 몇 년째, 우연히 이 식당을 알고나서부터는 계속 그렇게 제주 여행을 시작하고 있다. 간판 한쪽에 전복뚝배기라고 쓰여 있지만 전복뚝배기는 안 판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곳은 제주가 아니다. 드라마 ‘도깨비‘에서 주인공이 빨간 문을 열고 다른 시공간을 만나는 것처럼 나는 낡은 새시 문을 살며시 열고 내가 언제나 그리워하는 그곳으로 들어간다. 나지막하게 흐르는 베트남어 노래. 톤이 높고 명랑하고 경쾌한 베트남어 소리. 나는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베트남에 도착했다. 테이블은 세 개,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는 옛날식 작은 방이 하나. 방 안과 홀 여기저기에 노랗고 붉은 베트남 새해 장식들이 걸려 있어 왠지 새해 인사를 나눠야 할 것 같다.
소고기 쌀국수 분보를 주문한다. 제주에 산다면 매일 먹었을 것 같은, 그렇게 365일 먹는다해도 절대로 물리지 않을 것 같은 이 식당의 분보. 붉은 빛을 띤 맑게 우린 국물에 사태와 양지살이 소복하게 얹어졌다. 예쁘게 채친 양파, 싱싱한 숙주와 고수. 건면이지만 부드럽게 잘 풀어서 꼭 생면 같은 촉감의 면발. 여기에 테이블에 놓인 여자 사장님이 직접 만든다는 고추 소스와 레몬즙이 들어가면 분보는 마치 내 입맛을 알고 딱 맞춰서 요리해 준 것처럼 나를 감동시킨다. 하지만 이곳의 진짜 맛은 따로 있는 지도 모르겠다. 그 특별한 맛은 아마도 낯선 타지에 와서 사는 베트남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칸막이가 있어 얼굴은 안 보이는 여자 사장님이 전화를 받는다. 베트남 손님들의 전화다. 음식을 주문하기도 하고 안부를 주고받기도 한다. 반갑고 다정하게 통화하는 소리까지 있으니 더 베트남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혹시나 식당이 쉬는 날은 아닌지 알아보려고 전화를 하면 '알로'하며 여자 사장님이 베트남어로 먼저 받는다. 내가 '여보세요', 한국말을 해야 남자 사장님이 넘겨받는다. 전화를 거는 거의 대부분이 베트남 이주여성들이라 그럴테다. 한국어가 서툰 그녀들이 '알로', 하고 반겨주는 여자 사장님의 음성을 들으면 얼마나 반가울까. 편하게 전화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뭔가 안심이 될 것이다.
“아마 제주에 사는 베트남 사람들은 이 식당을 다 알 거예요.”
홀에서 손님을 맞는 남자 사장님의 말이다.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 여자 사장님과 남자 사장님은 부부다. 결혼 후 두 사람은 남자 사장님이 하던 식당을 그만두고 베트남 음식을 팔기 시작했다. 남원식당이라는 간판은 그대로 둔 채로. 그게 2010년이라니 벌써 15년이나 된 식당. 처음엔 그저 제주도에 사는 베트남 사람들을 위해 베트남 음식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고 한다. 간판을 바꿔 달지 않은 것도 이해가 된다. 알음알음으로 오지 간판을 보고 들어오는 게 아니니 말이다. 그러다가 점차 제주 사람들, 여행자들에게도 알려지면서 지금은 한국인 손님과 베트남인 손님 비율이 반반이 되었다고 한다.
작은 방에는 주로 아이들과 함께 온 베트남 엄마들이 앉아 있을 때가 많다. 낡고 좁은 공간이지만 정성껏 쓸고 닦아서 반짝반짝 빛나는 그 방에 앉아서 국수나 반미 샌드위치를 먹는 엄마들의 모습은 편안하고 평온해 보인다. 식당을 하는 큰언니집에 잠깐 쉬러 들렀다가 언니가 해준 음식을 먹는 듯한 표정이다. 멀리 떠나온 고국의 음식을 서툰 한국어 말고 유창한 베트남어로 속 시원하게 주문해 먹으며 행복해하는 기분이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런 엄마 곁에서 아이도 마냥 즐겁다.
음식을 다 먹고 나가는 엄마와 아이. 엄마가 아이에게 여자 사장님께 인사를 하라고 시키며 베트남어를 알려준다. 아이가 그 말을 예쁘게 따라 한다.
[꼰 베(con về)]
저 집에 가요.
앙증맞은 귀여운 발음과 목소리. 남자 사장님도 아이에게 한없이 사랑스러운 눈빛을 보내며 한국어를 가르쳐준다.
[깜언 니에우(cảm ơn nhiều)]
많이 감사합니다.
단어를 정확히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에 어색한 말이 되었지만 잠깐의 '한국어-베트남어 교실'은 까르르 웃음과 정이 넘쳐났다.
여자 사장님은 베트남 남부의 소읍 오몬이 고향이라고 한다. 오몬. 처음 들어보는 낯선 이름을 지도에서 찾아보았다. 껀터 위쪽에 있는 자그마한 마을이다. 그 먼 데서 날아와 제주에 일찍 정착한 여자 사장님이 만들어 주는 베트남 음식. 그러니 베트남 이주여성들에게 이곳의 맛은 이국에서 만난 고향 언니의 품처럼 푸근하고 따뜻한 맛이리라. 내가 식당에 머무는 동안 그녀들이 계속 들어오고 나간다. 맛있게 한 그릇 비우고 일어나 여자 사장님과 짧은 대화를 나누고 가는 그녀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환하다.
식당을 나선다. 가게 바깥 햇빛 잘 드는 곳에 깨끗이 설거지한 그릇을 말리고 있다. 베트남에서 흔히 보이는 그 풍경을 뒤로하고 나는 그제야 베트남을 떠나 제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