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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an Aug 18. 2020

무슨 맛일까? 세상 유일한 친구가 만들어준 프렌치토스트

영화 <로제타> 속 한 장면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다가 음식이 등장하면 나는 멈칫한다. 주인공이 홀로, 혹은 누군가와 함께 무언가를 먹는 장면이 나올 때면. 그 장면들은 내용 전체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 별로 연관이 없을 때도 있다. 대단한 음식일 때도 있지만 그냥 우리가 늘 먹는 특별할 것 없는 음식일 때도, 볼품없이 허름하고 초라할 때도 있다. 그래도 나는 그 장면들을 유심히 바라본다. 솔직하고 쓸쓸하고 끈질긴 생명력 같은 것,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보드랍고 포근한 무엇이 그 안에 숨어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이다.


*영화 <로제타>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초등학생 때였을까 아니면 더 어릴 적이었을까. 흐릿하게 기억난다. 계란과 우유에 식빵을 적셔서 프라이팬에 굽고 설탕을 솔솔솔 뿌린 그것. 엄마가 만들어 준 생소한 간식은 냄새부터 근사했다. 세상에 태어나 프렌치토스트를 처음 만난 날이었다. 물론 그때는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줄 몰랐다.


엄마도 처음 만드는 거라 뭔가 엉성한 모양이었지만 막 부쳐서 따끈하고 보드랍고 달콤하며 고소한 그것을 입 안에 넣었을 때는 깜짝 놀랐다. 입안 가득 퍼지는 낯설면서도 기분 좋은 감촉이 아직도 아련하게 그려진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 <로제타>를 보다가 그날의 어설프고 폭신하고 설탕 알갱이가 톡톡 씹히던 프렌치토스트가 떠올랐다.




도시 외곽 캠핑지 트레일러에서 알코올 중독인 엄마와 둘이 사는 소녀 로제타. 어떻게든 불법이 아닌 제대로 된 방법으로 일을 해서 떳떳하게 번 돈으로 살고 싶은 로제타에게 안정된 일자리를 구하는 일은 너무나 어렵다. 아무리 일을 잘해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자꾸 해고를 당하고, 삶에 아무런 의욕이 없는 엄마는 로제타를 힘들게만 한다. 자신을 알코올 중독 치료소에 보내려 하자 로제타를 밀쳐 강물에 빠트리고는 도망을 가버렸다. 로제타는 살기 위해 홀로, 지켜보기도 안쓰러울 정도로 안간힘을 쓰지만 어떤 것도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한없이 삶이 버겁고 쓸쓸해진 어느 날, 로제타는 웬일인지 그동안은 절대 곁을 내주지 않았던, 로제타에게 호의를 보이는 청년의 집에 찾아간다. 와플 가게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인데, 사방팔방으로 다니며 일자리를 찾던 로제타를 도와주었다. 청년은 순수한 마음으로 로제타를 대한다. 좁디좁은 집에서 마루 운동을 보여주겠다며 물구나무를 서다가 넘어지자 로제타가 웃는다. 땅에 가만히 발 붙이고 있을 시간조차 없다는 듯 언제나 뛰듯이 걸으며 일을 찾던 로제타가 영화가 시작된 지 한참 만에야 한 곳에 가만히 서있다.


장면이 바뀌고 로제타와 청년은 식탁에 앉아 있다. 로제타는 고개를 푹 묻고 칼과 포크로 야무지게 뭔가를 먹는다. 청년이 자꾸 말을 붙이는데도 고개를 안 든다. 스테이크인 줄 알았던 그건 프렌치토스트였다. 청년이 더 먹겠냐고 묻자 로제타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제서야 사양했던 맥주도 한 병 달라고 해서 단숨에 마신다. 무엇으로도 가시지 않을 삶의 고단함과 피로 같은 것들을 삼켜버리려는 듯. 그리고는 새로 접시에 놓인 프렌치토스트에 설탕을 듬뿍 뿌린 뒤 다시 열심히 먹는다. 스테이크보다 더 맛있게. 일을 찾아다닐 때처럼, 최선을 다해 일에 집중할 때처럼 오직 토스트만 보면서. 두 사람의 식탁에는 남들은 시시하다고 여길지도 모를 너무나 작은 행복이 일렁이고 있었다. 청년과 눈이 마주치면 마치 그 짧디 짧은 행복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눈을 못 맞추는 로제타. 허겁지겁 프렌치토스트를 먹는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고 싶었다.



막 친구가 된, 어쩌면 태어나 처음 사귄 이 세상 유일한 친구일지도 모를 이가 만들어준 프렌치토스트. 로제타, 그때의 토스트는 어떤 맛이었니?




친구 집 작은 식탁에 앉아 프렌치토스트를 먹는 시간, 로제타는 아주 잠시 동안이지만 삶의 무거움 들을 내려놓은 듯 보인다. 일과 돈과 집과 감당하기 힘든 엄마를 잠시 잊은 듯 보인다. 엄마가 걱정스럽지만, 엄마에게는 미안하지만, 한편으로는 엄마가 로제타를 위해 로제타 인생 밖으로 사라져 준 것처럼 생각됐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밤. 가까스로 얻은 일과, 아마도 처음 사귄 친구와, 프렌치토스트와 맥주와 어설픈 춤이 있던 밤. 로제타는 아주 아주 오랜만에 단잠을 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잔인하게도 로제타의 행복은 깨져버린다. 잠들기 전 모든 일들이 꿈이었던 것처럼 사라진다. 다시 일자리를 잃은 로제타는 생각 끝에 가게 사장에게 청년의 비밀(몰래 자기가 만든 와플을 끼워서 팔고 있었다)을 폭로해 일을 가로챈다. 세상에 하나뿐일지도 모를, 프렌치토스트를 나눠 먹으며 함께 웃었던 친구를 포기한다.


그 뒤로도 로제타의 시련은 계속된다. 일은 하지만 친구를 배신했다는 죄책감과 미안함에 괴로워하는 나날이 이어질 때 엄마가 만취 상태로 나타난다. 로제타는 죽으려고 결심하지만 그조차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동안 어떤 일이 생겨도 참고 참았던 로제타가 울음을 터뜨린다. 마침 로제타 주위를 맴돌던 청년이 로제타를 일으킨다. 다시 일어선 로제타의 복잡한 얼굴에서 영화는 끝난다.



로제타는 어떻게 되었을까? 다시 힘을 내 살아보기로 마음을 바꿨을까? 청년과는 다시 친구가 되었을까? 와플 가게 일은 계속하고 있을까? 또 한 번 친구와 함께 프렌치토스트와 맥주를 먹는 날이 올까?


쓸쓸하고 외로운 누군가를 식탁에 앉혀놓고 프렌치토스트를 만들어 주고 싶은 날이다. 보들보들하고 폭신폭신하고 달콤한 프렌치토스트가 구름 침대가 되어 그 사람을 잠시나마 포근하게 안아 주면 좋겠다. 그 밤 로제타 곁에 있어준 친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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