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이 오기를 기다리는 중
시험을 준비하거나, 무언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걸 주변에 알리면 꼭 그런 말을 듣는다.
“독하게 해라… 그래야 이룰 수 있다.”
마치 독하게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모든 게 결정 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 말은 들을 때마다 묘하게 거슬린다.
'아니 난 독하게까진 하고 싶지 않은데...그럼 난 안 될 사람인가…?'
그런 불쾌한 생각이 스친다.
어떤 사람은 마음먹은 일을 반드시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이를 악물고 끝내 해내지만, 어떤 사람은 그저 무난하게 가다가 어느 순간 멈춰 서기도 한다.
‘생각보다 지치네?’라는 기분이 드는 순간, 억지로 의지를 불태우기보다 조용히 손을 놓는 사람, 그게 바로 나다.
그럼 나는 나약한 사람일까? 이것밖에 못 해내는 사람인 걸까?
이런 의심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마다 나 자신을 믿기란 어려워진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에너지의 총량이 다르고, 어떤 날은 그 힘을 다른 데에 쓰고 싶을 때도 있는 법인데.
나는 나의 근성에 핍박을 준다.
독하게 버텨라, 끝까지 해내라—!
타당한 말이라고 해서 모두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독하게 사는 데에 정말 재능이 없다.
기운이 쫘악 빠지고, 아무 의욕도 나지 않고, 세상이랑 단절된 채로 있고 싶은 날이 수시로 있다.
그런 날이 오면 그냥 그렇게 있는 거다.
아마 집안 대대로의 철천지 원수에게 복수를 해야 한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내가 독기를 품기란 쉽지 않다.
행동력이란 게 그렇다.
어떤 사람은 독기로 버티지만, 어떤 사람은 시간이 지나야 다시 움직인다.
나는 후자인 타입인 것이다.
‘독기’라는 부스터가 없어서 성취의 속도가 조금 느리긴 하지만, 대신 독기에 없는 나름의 여유와 숨을 누릴 수 있다.
사람마다 ‘제철’이 있다.
어떤 시기에는 확 몰입할 수 있는 ‘시즌’이 있다면, 또 어떤 시기에는 아무 일도 잡히지 않는 ‘비시즌’도 있다는 말이다.
나는 내 멱살을 잡고 꾸역꾸역 해내기보다는, 그 제철이 오기를 기다리는 편이다.
나에게 그림이 그렇다.
그림에 흥미가 없을 때는 억지로 해보려 해도 도무지 펜이 안 잡혔다.
그림 한 장을 그리면 물려서, 그 뒤로 1년은 그림에 손도 대지 않았다.
그렇게 5년쯤 지나서야, 비로소 그림에 진심인 나를 다시 만나게 된 거다.
아! 드디어 나에게 그림의 시즌이 온 것이구나— 싶었다.
그래서 그런지, ‘몇 년이라도 더 어릴 때 독하게 시작했더라면’이라는 후회는 없다.
나는 지금에서야 제철에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말로 그림을 공부할 수 있는 최적의 시기인 동시에, 지금이 내게 가장 빠른 시기인 셈이다.
무언가를 열심히 오래 하는 사람들을 보면, 딱 제철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작두를 타는 듯 보이기도 하다.
고통스러워 보이는데 즐거워 보이기도 하고, 근데 어딘가 광기가 서린…?
누군가에겐 그런 모습이 독한 모습으로 보일 수 있다.
그래서 나한테는 “독하게 해라”는 말이 “작두를 타라”는 말이랑 똑같이 들렸던 거다.
신내림을 안 받았는데 작두를 어떻게 탑니까…
내가 요즘 자주 해이해지고, 늘어진다면 그건 아직 각성할 시즌이 오지 않은 것뿐이다.
그럼 잠시 시원하게 내려두는 것도 방법이다.
비시즌에 독해지지 못하는 건 내 탓이 아니다.
환경이 그럴 만하니까, 지금은 힘을 줄 때가 아니라고 내 몸이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굳이 억지로 독하게 살 필요는 없다.
그저 나의 제철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최소한으로 인간답게만 살고자 한다.
“그냥 건강만 해다오, 나 자신…”
‘악으로 깡으로’ 대신에 이런 말을 스스로에게 해주는 편이 훨씬 낫다.
무언가를 하고자 할 때 치열함을 의무처럼 껴안게 되면, 시작하기도 전에 너무 쫄리니까…
쪼는 게 습관이 되면 인생 사는 게 괜히 더 어려워진다.
굳이 자체적으로 인생 난이도를 올리려고 하진 말자.
누군가에겐 ‘독함’이 에너지가 되지만, 나에겐 그게 독(毒)이 되나 보다.
독하게 살겠다고 자신을 몰아붙이기보다, “또 무너질 거지롱 헤헤” 하며 사는 편이 낫다.
번아웃이 오는 이유도 비슷하지 않은가.
에너지를 끝까지 짜내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속이 텅 비어버리고, 숨 쉬는 일조차 수고스러워지는 것.
나를 ‘성과 제조기’나 ‘스트레스 곳간’으로 쓰게 만들 만큼, 반드시 이뤄야만 하는 일은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독하게 살지 못하는 것도 또 하나의 삶의 방식인 것이다.
계절이 자연스럽게 바뀌듯, 우리 마음가짐도 제때에 맞춰 굳세어지는 시기가 있을 터다.
제철을 기다리는 과정을 어찌 나약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저 각자의 속도와 온도로 살아가는 것이다.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데 스스로 독하게 하지 못해 죄책감이 드는 일이 있다면, 그 일은 잠시 보류해 두어도 좋다.
강박이 쌓여 스트레스가 되고, 그게 몸속에 자리 잡는다면 그게 진짜 독이다.
의지를 세우는 일만큼이나, 내려놓는 일도 중요하다.
나 같은 개복치가 독기를 품게 되면 그냥 독 품은 개복치가 되기 때문에, 돌연사 안 하면 다행이다…
나는 나만의 다양한 제철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건강을 우선으로 챙기고 있으려 한다.
제철이 되면, 맛있는 열매를 수확하기 위해 몸이 알아서 움직일 것이다.
그 시기에는 하기 싫은 날도 잘 없다.
고통스러워도 "맛있다! 아-맛있다!" 하면서 하게 된다.
그때 가장 빛을 발하는 건 결국, 건강한 체력이다.
이따금은 그저 건강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다.
육체 건강과 정신 건강, 두 가지나 동시에 챙겨야 하는 거니까.
작디 작디 작은 인간주제에, 우주 정복할 것도 아니고...
무리하지 말고 건강 챙기기, 그 정도면 과하게 충분하지 않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