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생은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은가

현생의 결핍 들여다보는 법

by 나울
다음 생에는 뭘로 태어나고 싶어?


이 질문은 사람들마다 다양한 대답이 나와서 미롭다.

내가 다음 생에선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은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현생에서 내가 어떤 것에 결핍이 있고 어떤 갈망이 있는지 선명해진다.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그것이 생명이건 사물이건 상관없다.

중요한 건, 그것의 형태와 속성이다.

당신이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은지 생각해 보는 동안 나부터 말해보겠다.


다음 생이 있다면, 나는 돌멩이로 살고 싶다.

식당 테이블 위, 휴지를 눌러두고 있는 작은 돌멩이를 본 적 있을 거다.

그 돌멩이가 맡고 있는 임무는 단 하나다.

휴지가 날아가지 않게 가만히 눌러주는 일.

그것만으로 충분히 자기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무게 앞에서

살아갈수록 관계가 늘어나고, 역할은 복잡해진다.

나는 그냥 ‘나’이면서도, 누군가의 부모인 동시에,

누군가의 자식이며, 친구이고, 동료이고,

누군가의 기대를 짊어진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하나의 관계에서도 한 사람이 여러 역할이 수행해야 하기도 한다.

그 속에서 뭐부터 챙겨야 할지 몰라 머리가 지끈거릴 때가 많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챙기고 싶어도, 세상은 그 이상을 요구한다.


그런 순간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나를 찾아와 덮친다.

소화해 내야 하는 여러 가지 역할이 나의 작은 그릇에서 뒤섞인 채로 가득 차오른다.

그리고 이것들은 표면장력을 이루어 넘칠락 말락 간당간당한 상태가 된다.

흐르기 직전까지 나의 그릇에서 일렁일렁하다가

철썩, 하며 결국 넘쳐버리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단순하고, 무해하고, 그저 제자리에 우직하게 있는 것만으로도 의미를 다하는 존재,

휴지더미에 지긋이 앉아있는 돌멩이를 보면 위로를 받는다.


인간의 삶은 다채로워서 아름답지만 나에게는 벅차다.

그러니까 다음 생에는, 사람 발길 닿지 않는 높은 산 위에서 태어나야지.

그중에서도 졸졸 흐르는 계곡을 바라보며 고운 흙을 메우고 있는 한 개의 돌멩이가 되어야지.


나의 그 바람 속에는 영원한 평온이 있었다.



최선을 다하지만
무리는 하지 않는 돌멩이


생각해 보면, 돌멩이도 쭉 평화로웠던 건 아닐 거다.

한때는 커다랗고 투박한 바위였겠지.

깎이고 또 깎여서 비로소 휴지더미를 눌러주는 작은 돌멩이가 된 것일 테다.

그런데 돌멩이는 말하지 않는다.

“난 무려 왕년에 바위였다고~!” 하며 뽐내지도 않는다.

지나간 리즈 시절에 매달리지 않는다.


돌멩이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한다.

열심히 누르고 있다가도, 갑작스러운 거센 바람에 기껏 눌러둔 휴지가 저 멀리 날아가기도 한다.

래도 돌멩이는 거센 바람을, 가벼운 휴지를 탓하지 않는다.

그리고 날아간 휴지에 미련 두지도 않는다.

돌멩이는 바람이 불기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남은 휴지를 계속 누르고 있을 뿐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지만 무리하지 않는다. 돌멩이의 그런 점이 참 좋다.



나는 왜 돌멩이의 단단함을 원했을까


나는 가까이서 벌어지는 일들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며 지냈다.

주변에서 갈등이 일어나면 그것을 막지 못한 나의 잘못이라고 여겼다.

실제로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더 똑똑했더라면, 내가 더 현명했더라면 이런 싸움까지 번지지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런 생각들은 나를 소모시키고, 불필요하게 많은 에너지를 빼앗아 갔다.


그렇게 변화무쌍한 주변에 따라 죄책감과 무능감에 쉽게 잠식되었고, 사소한 일에도 마음이 크게 흔들리곤 했다.

그래서 휴지더미를 누르는 돌멩이 같은 삶을 동경하게 되었다.

크지 않더라도 단단해서 불필요하게 요동치지 않는 삶.

최선을 다하면 딱 그만큼의 의미가 보장되는 삶.


그런데 어느 날 생각에 반전을 조금 주었다.

반대로 만약 돌멩이가 ‘지금의 나로 살게 된다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그 모습을 떠올리니 답은 단순했다.

제자리를 지키되,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묵묵히 역할을 다하는 삶.

그렇다면, 나 역시 컨트롤할 수 없는 영역까지 붙잡으려 애쓰기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 순간,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후로 내 손을 넘어선 일에 대해서는 스스로를 책망하지 않기로 했다.

내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모든 것을 내 책임으로 떠맡을 필요는 없었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힘들고 부정적인 일들은 내가 무능해서가 아니라, 본래부터 거스를 수 없고 내가 다스릴 수도 없는 것이었다.


물론 여전히 애매한 상황은 남아있다.

내가 신경을 쓰고 나서는 것이 의미 있는 순간도 있지만, 아무리 애써도 그 자체가 무의미한 순간도 있다.

그 경계는 아직 잘 판단하기가 어렵다.

아마도 그 이유는 판단 기준 자체가 불명확하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것을 제쳐두고 오직 나만 편해지는 쪽으로 판단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건, 내가 나만큼이나 주변을 아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런 애매한 상황이 주는 혼란에서 빠져나와 스스로를 회복하는 속도는 분명히 조금씩 빨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혹시, 또 인간으로 태어나고 싶은 사람?

다음 생에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냐는 질문에

다음 생에는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 마음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굳이, 다시 한번 묻는다.

이번에는 조금 더 대답하기 쉽도록 조건을 붙였다.


“꼭 생명체가 아니어도 돼! 다시 물어볼게. 넌 다음 생에 뭘로 태어날래?”


터무니없는 질문 놀이 같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상상은 지금 우리네 인생이 어떤지 한 번쯤 돌아보게 해 주니까 재미있.

아는 사람 중에서는 이 질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더니

다음 생에는 범고래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왜 범고래로 태어나고 싶어?”

“범고래 눈알 본 적 있어? 걔는 진짜 살벌해. 천적이 없대.”

“오홍. 그게 왜? 너는 이번생에 천적이 많아?

“아니? 그냥 절대적 강자로 살아보고 싶어. 히!”


범고래라니,

들어본 대답 중 제일 호방했다.


“힉, 무서워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꼬옥 천적이 있어야겠다”


라며 농담조로 놀리곤 하지만,

오히려 또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이 은은한 광기가 느껴져서 제일 무섭긴 하다…


금,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