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이거 하려고 태어났나 보다

모든 게 충분하다 느껴진 그 순간

by 나울
평범한 날, 평범한 저녁

그날도 비슷하게 지쳐있던, 특별할 것 없는 하루다.

일정을 끝내고 나니 밤 9시가 조금 넘었다.

바로 전 회차에 등장한, 범고래가 되고 싶다던 친구를 만나 제일 좋아하는 동네 치킨집에 갔다.


“오늘은 뭐 시켜 먹어볼까?”

“반반순살로 할까?”

“저번에는 왕갈비맛 먹었으니까 이번엔 체다뿌링 먹어볼까?”


별 거 아니지만 중요한 논의를 거치고 주문한 치킨은 두 배로 맛있다.


야식을 다 먹고 나서는 늘 그렇듯 아이스크림 할인점에 들린다.

나는 항상 저당 아이스크림 중에서 한참을 고민하는 반면, 친구는 그냥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을 척척 고른다.


사이좋게 아이스크림을 입에 하나씩 물고 바로 옆에 새로 지어진 공원을 향해 걷는다.

이제 밤바람은 꽤 가을다워지고 있다.

가까운 공원에 들어서면 길고양이가 다가와 애교를 부리지만, 아쉽게도 우리는 츄르가 없다.

츄르가 있어 보이는지 우리한테 자꾸 비비려 하는 고양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카메라를 켜서 귀여움만 마음껏 취한다.

한참을 귀여워 한 고양이를 뒤로 하고 공원을 뱅글뱅글 걷다 보면 송골송골 땀이 나기 시작한다.

평소에 땀나는 걸 싫어하는 나지만, 오늘은 화장도 안 했고 츄리닝 차림이라 땀을 흘려도 괜찮은 날이다.



특별하지 않은 것이 주는 힘


그때, 문득 그런 느낌이 들었다.


“어? 지금 왜 이렇게 좋지?”


별다를 것 없는 순간인데, 마음이 묘하게 환해졌다.

뭔가 씻겨 내려가는 듯했고, 세상이 이불처럼 폭닥폭닥했다.

완벽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강하게 든 생각,


아, 나는 그냥 얘랑 밤에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산책하려고 태어났나 보다.


좋은 기분도 잠시, 놀란 감정이 곧장 밀려왔다.

그 순간을 이루는 재료가 너무나도 평범했기 때문이다.

사람, 아이스크림, 산책.

그저 이 세 가지뿐이었는데 지쳐 있던 마음은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치료되는 중이었다.

더도 덜도 필요 없는, 딱 충분한 기분이었다.


충분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은 거창한 성취도, 화려한 이벤트도 아니었다.

그냥 누군가와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며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으며 걸었을 뿐이다.

그랬을 뿐인데 그 순간 나의 몸은, 이 세상 모든 게 충분 것만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다.


하늘도 건물도 다 낮아 보였다.

어떤 것에도 눌리고 있지 않는 듯한 청량한 해방감까지 느껴졌다.

스트레스에 유독 약한 나이지만, 이런 날이 또 나를 기다리고 있다면 힘든 날도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평범함이 건네는 폭닥함


낮에 갑자기 어머니가 기쁜 일이 있는 듯한 표정을 하시고는 아침에 있었던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셨다.

“아니, 오늘 아침에 아빠가 큰 방에서 출근 준비를 하고 계셨거든? 아빠가 베란다에 널어둔 셔츠를 거두고 있는 걸 엄마가 보고 있었는데, 그 순간 아빠 뒤에서 햇살이 부드럽게 싸—악 비치는 거야! 근데 문득, 햇살을 등지고 셔츠를 거두고 있는, 아빠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엄마의 그 뒷모습을 떠올려보는데, 아—그 순간에 엄마 정말 행복하더라!”


그 순간을 떠올리시는 어머니의 표정도 정말 행복해 보였다.

정신없이 지내느라 놓치고 있던, 진작 음미했어야 할 감정들에 대해 새삼 설레어하는 모습이었다.

그 느낌인지 고스란히 전해져서 나도 알 것만 같았다.


삶을 버티게 하는 힘은 어쩌면 그런 데 있는지도 모른다.

평범한 순간이 주는 안정감.

별것 아닌 순간이 건네는 폭닥함.

그런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 힘든 순간을 버틸 수 있는 용기가 되는 것이다.



모든 게 충분했던 그날처럼


제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우리는 우주 속 먼지 같은 존재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먼지 체급에 맞지 않게, 스트레스는 왜 이리 무겁고 크게만 느껴지는지.

반갑지 않은 손님인 스트레스는 앞으로도 계속 찾아올 것이고, 이 때문에 마음에 구멍 날 일도 종종 있을 것이다.


병원 가면 항상 듣는 말이 있다.

“스트레스 관리하시고요~”

그러면 난 속으로 중얼거린다.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스트레스는 관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 원인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이상, 우리는 그 무한한 굴레 속에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저 스트레스를 맞닥뜨리며 체력을 소모하고 회복하는 과정을 잘 반복해야 할 뿐이다.

국 나를 무너뜨리는 건 스트레스 그 자체가 아니라, 회복할 시간을 챙기지 못하는 데에 있었다.


그 힘을 길러주는 순간이 바로 이런 날이다.

모든 게 충분하게 느껴지던 그날처럼,

오늘은 작게 행복하게 지내고, 내일은 조금 웃으면서 잘 지내자.

우주 속 작은 먼지 주제에 복잡하게 사는 나는, 오늘도 작은 평범함 속에서 살아갈 힘을 얻는다.

금,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