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다움은 왜 인간에게만 기대될까
털이 희끗희끗해져도
요즘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이 많아졌다.
강아지든 고양이든, 나이를 꽤 먹었는데도 아기 같은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털이 희끗희끗해지고 귀가 축 늘어져도, 배를 뒤집고 눈을 맞추면 금세 기대어 온다. 그 모습이 참 신기하다.
노견인데도 어쩜 아직까지 이렇게 아기 같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기와 다를 바 없었던 노견의 모습을 보니, 생각이 자연스럽게 사람에게로 이어진다.
인간에게만 기대되는 ‘어른다움’
우리는 어른이 된 후,
나잇대에 맞추어 무엇을 성취했어야 하는지에 대한 암묵적 리스트가 존재한다.
‘어른스럽게 행동해야 한다’는 기대를 받는 것은 덤이다.
즉, 사람이 성체가 되면 ‘어른다움’이라는 개념이 따라붙는 것이다.
성인이 되면 날것의 감정 표현을 조심해야 하고, 특히 투정 부리거나 약한 소리 하면 “철이 안 들었다” “나잇값을 못 한다” 이런 비난 섞인 말을 듣기도 한다.
또 어느 날은 내가 나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날도 있다.
그런데 강아지는 그렇지 않다.
“야, 저 강아지는 이제 성견인데도 철이 안 들었네” 이런 말은 하지 않으니까.
강아지는 노견이 되어서도 주인 앞에 있으면 여전히 애교도 부리고 엄살도 피우는데, 그런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보인다.
편안함이 만든 어린 마음
노견의 그런 모습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종을 막론하고 생명은 편안한 곳에 있을 때 어린 모습으로 돌아가는구나.
그렇다면 사람도 그 틀에서 벗어날 수 없지 않을까? 곁에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있을 때면, 괜히 응석 부리면서 바보 같은 말투를 쓰게 되고 별것 아닌 일에 투정 부리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인간이란 그렇다.
혼자 있을 땐 이상하리만큼 씩씩해진다.
마음 둘 곳이 없으면 그냥 꿀꺽 삼켜버린다. 아프다고도, 힘들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부드럽게 만들 여유가 없으니, 애처럼 굴 틈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곁에 믿을 만한 존재가 생기면 달라진다.
혼자일 땐 무덤덤해 보이다가도, 든든한 주인 앞에 선 강아지가 배를 드러내듯, 누군가 곁에 있기만 해도 말수가 많아지고, 유익함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장난과 유치한 말만 쏟아내곤 한다.
인간에게도
‘주인님’ 같은 존재가 있다면
생각해 보면, 인간도 동물이니까 말이다.
인간이라고 해서 생명이 지닌 감정의 선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법일테다.
사람은 동물처럼 솔직하진 않지만, 본능만은 꼭 닮아 있다.
그래서 누군가 내 곁에 있어 준 시간들—그 순간들 속에서 나는 ‘생각보다 원래 더 유약한 사람이구나’라는 자각을 한다.
만약 인간을 평생 지켜주는 강인한 ‘절대적 존재’가 곁에 있다면,
나이가 들어도 겉모습에만 노화가 올뿐, 마음은 여전히 유아기였던 아이로 남아 칭얼대고 애교를 부리고 있지 않을까?
과연 인간 세상에서 ‘참어르신’, ‘인자한 노인’ 같은 상(像)은 존재하고 있을까?
참어르신은 과연 스스로 참어르신이 되고 싶었을까?
유아퇴행, 관계의 또 다른 이름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게 된다.
나에게 유아퇴행이 가능한 관계가 있나?
혹은 내가 누군가의 유아퇴행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일까?
물론, 무조건 ‘유아퇴행을 할 수 있는 관계=최고의 관계’라고 정의할 수는 없다.
세상에는 수많은 서사가 뒤섞여 있는 관계들이 존재하고, 어떤 관계는 서로 어른처럼 굴어야 유지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래도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라는 게, 나약하고 유치한 모습까지 보여줄 수 있어야 비로소 깊어지는 것은 분명하다.
가끔 피드에 뜨는 커플 릴스나 쇼츠를 보면, 혀 짧은 소리를 내며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여자친구와, 그 옆에서 함께 어울리는 남자친구의 모습이 담겨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모습을 귀엽게 여기지만, “다 큰 성인이 왜 저러냐”, “징그럽다” 같은 비난과 조롱으로 가득한 댓글창을 마주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영상 속 그런 연인들의 모습이 오히려 반갑고 좋다.
단둘만이 살아 숨 쉬는 세계를 구축해, 그 안에서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며 살아가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철든 척하며 사는 우리이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나를 철들게 하는 사람보다는 나를 유아기로 돌아가게 하는 사람이 진정한 반쪽이 아닐까 싶다.
속 빈 강정처럼, 겉은 그럴싸하게 성장했지만 언제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은 불안정한 우리네 모습이 곳곳에 많으니까.
유아퇴행
언뜻 들으면 부정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어감이다.
하지만 누군가 앞에서 자연스레 유아퇴행적 모습이 나온다는 것은, ‘나의 뇌에 잠시 힘을 빼도 괜찮은 시간’을 만들어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긍정적 증거가 아닐까.
난 그렇게 생각한다.
어른이라고 해서 어떻게 항상 어른처럼 살 수 있을까.
우리 지구 나이, 약 45억 년에 비해 인간은 자그마치 100년을 사는 것도 쉽지 않은데, 오히려 철이 드는 것이 기적인 것 같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현대 인간의 생존 시장에서는 ‘어른스러운 태도’가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기 때문에 그냥 다들 철든 척하면서 사는 게 아닐까 싶다.
나는 어떤 쪽일까?
이쯤 되어서 나는 어떠한지 생각을 해본다.
나는 유아퇴행하는 쪽일까?
아니면 그것을 받아주는 쪽일까?
혹은 둘 다 적당히 오가는 쪽이려나?
만약 “나는 둘 다 적당히 오가는 쪽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정말 대단한 것 같다.
그건 인격적으로 정말 성숙해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약한 면모를 인정하는 동시에, 상대도 갖고 있을 어리고 여린 살갗 같은 마음을 알아보고 그것을 껴안아주려고 하는 거니까.
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며, 얼마나 소중한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 마음이 너무 무거워 무게를 쉬이 가늠할 수 없을 정도다.
그렇기 때문에 둘 다 적당히 오갈 수 있는 사람은 마음이 건강하고 맑고 솔직한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만드는 관계는 싱싱하게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다.
과연 연애 이야기일까?
가장 처음 ‘유아퇴행’이라는 주제에 대해 말을 꺼냈을 때, 나는 내가 연애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며칠 동안 곱씹어보니, 꼭 연애에만 한정된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그것이 연애든, 가족이든, 우정이든, 그냥 그 사람의 옆에 머물고 싶은, 어떤 감정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글을 읽으며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를 떠올린 당신도 참 따뜻한 사람이다.
팍팍해지는 세상일수록 서로의 철없는 속내를 사랑해 주는 오늘이 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