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J씨에게
이제는 여름의 시작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장마를 맞이했네요. 저 어릴 때는 6월이 장마 기간이었다 최근 10년간은 6월에는 장마가 오지 않고 8~9월에 장마가 온 것 같아요. 그런데 올해는 다시 6월에 장마가 와서 뭔가 신선하기도 하고 오래전 이야기들이 많이 떠오릅니다. 장마가 언제 자주 왔는지는 저만의 착각이겠지만 여하튼 6월에 비가 많이 오니 나름 감성적이 되네요. 그래도 어릴 때만큼은 아닙니다.
어린 시절에는 참 인생이 꿈같을 줄 알았어요. 좋은 학교 나오면 연봉 1억은 가뿐히 넘고 서울에 집도 사고 차도 사고 예쁜 와이프에 애들도 2명 정도 있고, 자동차도 외제차를 끌고... 그런 인생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마주하고 있는 제 삶은 정반대더군요. 좋은 학교(?)를 가기 위해 많은 걸 참고 견뎠건만 돌아오는 건 구질구질한 인생이라니 한동안은 현타도 많이 왔던 것 같아요. 현실의 풍파 속에 어릴 적 꿈은 고이 접어 이제는 쓰지 않는 일기장 속에 남겨두었습니다.
그런데 일하면서 또 이런 구질구질하게 보이던 회사도 나름 적응되고 괜찮아지는 거 같아요. '적당'이라는 두 글자 단어가 인생의 모토가 될 수 있다면 회사는 회사대로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희망을 버리고 산다면 말이에요. '더 나은 내일이 있을 수 있다'는 희망, '내가 꿈꾸는 인생에 대한 로망', '이루고 싶었던 꿈', '보람찬 인생' 책에서 봐왔던 문구들은 오래된 일기장 속에 남겨놓을 수만 있다면 이렇게 사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월급 따박따박 나오는 하루하루는 어딘가 공허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편안하니깐요.
이 편안함이 중요하다면 우리는 회사를 열심히 다니면 좋습니다. 상사가 뭐라고 하든 고객이 짜증 나게 하든 편안함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감수할만한 것들이지요. 몸이 너무 편안해, 결과적으로 우리는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 '회사 인간'으로 살아갑니다. 아 그래도 회사 인간이 나쁜 건 아니에요. 회사 인간을 선택했지만 대신 나의 가정, 나의 개인적인 삶을 더 풍요롭게 가꿀 수도 있으니깐요.
하지만 낡은 일기장 속에 남아있던 꿈들은 편안함 속에서 지금의 이 순간을 불편하게 합니다. '이래도 되는 걸까?' 하고 말이죠. 나는 꿈도 많고 야망도 많고, 이루고 싶은 것도 많은 사람이었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했구나 하는 죄책감이 스멀스멀 몰려올 때면 한동안은 우울하기도 합니다. 그럴 땐 내가 너무 강박적이라고, 지금의 소중함을 생각하지 못한다고 스스로를 타이르기도 하지만 쉽게 가라앉지 않는 마음속에서 밤을 지새울 때가 있어요.
결국 저도 언젠가는 선택을 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회사에 남을지 떠날지를 말이죠. 그런데 우선 내가 바라는 인생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어릴 적 바라던 인생은 껍데기의 부질없는 삶이었거든요. 아무것도 없이 보여주기 위한 꿈. 참 어릴 때부터 꿈마저도 이렇게 허망했으니 지금 삶도 공허하게 느껴지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회사마저 기대 없이 들어와서 지금 더 마음이 심란해지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말이에요, 그 남아있던 일기장 속 꿈들이 다 잘못된 건 아닌 거 같아요. 그 꿈은 허망했어도 그래도 삶에 대한 기대가 가득했으니 말입니다. 다만 현실을 마주하면서 스스로가 성장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 기대가 가득했던 그때의 힘을 다시 꺼내 이번에는 세상과 마주하며 좀 더 견고하고, 열려있는 꿈을 다시금 그려보고자 합니다. 좀 더 소박하게 그려보고자 하지만, 글쎄요, 워낙 허영에 낭비벽이 심하니 이번에는 더 크고 화려하게 그리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J씨는 다시 현실 속에서 꿈을 그리고 있나요. 이곳에서 떠나면서 그리던 꿈은 잘 지키고 있나요. 분명 그때와는 다른 그림일 수도 있지만, 그때 붙들었던 희망을 놓지지 말고 꽉 잡고 있어요. 희망이 없이는 우리는 살아갈 수 없는 것 같아요. 모두 다 잘될 거예요.
장마가 언제 끝날지 모르겠지만, 장마가 끝나면 이제 덥디 더운 여름이 오겠죠. 덥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나날들을 바라며 이만 글을 마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