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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도어 앞에서, 김 아무개 씨를 기억하며

습작의 창고

by 나바드
덕분에, 안전합니다.

스크린도어 앞에서, 김 아무개 씨를 기억하며


한때 나는 삼신할머니가 던진 주사위 탓에 인생을 잃었다고 여겼다. 세상이 밉고, 모든 것이 억울하고,

오로지 나만이 피해자인 것 같은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의 나는, 세상을 향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생각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한 사건을 마주하게 됐다.

2016년 5월 28일 오후 5시 57분.

구의역 스크린도어 앞에서, 김 아무개 씨가 사망했다. 그는 1997년생, 나와 비슷한 나이였다.


그의 죽음 앞에서 나는 오래도록 서 있었다.

우리는 무슨 차이가 있었을까.

왜 그는 좁고 어두운 선로에서 일하고 있었고,

나는 대학 캠퍼스의 햇살 아래 앉아 있었을까.


차이는 없었다.

다만 출발선이 달랐을 뿐이다.

그저 삼신할머니의 주사위가

그를 그곳에, 나를 이곳에 데려다 놓았을 뿐이다.


그날 이후, 나는 부끄러웠고, 미안했고,

무기력했다. 내가 그의 상황이었다면,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은 아마도 나였을 것이다.


그로부터 거의 10년이 지났다.

그러나 김 아무개 씨 이후에도

여전히 김 모 군, 박 모 군, 최 모 군, 홍 모 군…

수많은 이름들이 그 줄을 따라가고 있다.

얼마나 죽어야 바뀔까요?

도대체 이 반복되는 죽음의 줄을

누가, 언제, 어떻게 끊어줄 것인가.

나는 기다리고 있다. 절실하게.


세상에는 수많은 직업이 있다.

그리고 그중 많은 일은 위험하다.

그래서 2인 1조가 기본 원칙이다.

경찰도, 전기 검수도, 승강기 점검도,

스크린도어 설치와 유지 보수도.


그럼에도 여전히 누군가는

혼자 선로에 들어간다.

혼자, 어둠 속으로 들어가

혼자, 죽는다.


나는 바란다.

정의로운 철학을 가진 자가 난세에 등장하기를.


철학 = Philosophy.

Philo는 ‘사랑하다’, Sophy는 ‘지혜’라는 뜻이다.

지혜를 사랑하는 자.

철학 또한 ‘밝을 철’, ‘배울 학’이다.

밝음을 배우는 것,

어둠을 인식하고,

그 안에서 길을 찾으려는 자세.


빛없는 노동 환경에서

누군가는 오늘도 일하고 있다.

어둠 속에서, 위험 속에서,

자신의 생계를 지키기 위해 홀로 선다.


누군가는 한때 노동운동권의 스타였다.

지금은 권력의 전화기 너머에서

“나 도지사요”를 외치는 목소리로 기억된다.


한 사람은 소년공 출신으로 노동인권 변호사가 되었고, 지금은 정치인이 되어 있다. 그의 이번 노동 공약은 이렇다. “주 4일제, 주 4.5일제, OECD 국가 평균이하 노동시간”

그리고 “근로조건이 악화되지 않도록 철저히 보완.”


그러나 구체적이지 않다. 그의 말로는 하청도, 재하청도, 스크린도어 앞에 홀로 서는 노동자도 구하지 못한다.


대한민국 산업 구조의 핵심은 납기와 기일이다.

위에서 내려온 공기가, 하청을 거치고,

끝내 노동자의 어깨 위로 쏟아진다.


그들은 또다시,

지혜 없는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물론,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전문가의 견해도 아니고,

절대적으로 옳다는 주장도 아니다.

누군가의 생각과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오늘, 그 사건을 기억하며

스크린도어 앞에 선다.


요즘은 일주일에 두 번쯤 지하철을 탑니다.

타는 곳 근처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내리는 곳에서는 치료를 받고 돌아옵니다.

왕복 시간이 꽤 길어서 졸음과 피로 사이 어딘가에서 잠시라도 회복을 위해 지하철을 탑니다.


스크린도어 앞에 서면 문득 10년 전, 그 사건이 떠오릅니다.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그때의 김 아무개 씨를 기억하며,

이 글을 씁니다.


몇 해 전부터 죽음에 대해

조금씩,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가장 슬픈 일은,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들이

영원히 내 존재 자체를 잊어버리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하루 24시간

누군가가 나를 기억하길 바라는 건 아닙니다.

그저 아주 가끔, 문득, 뜬금없이라도

누군가의 마음에 스쳐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불쑥 들곤 합니다.


아마 구의역 김 아무개 씨도

그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단 한 번의 일면식도 없던

어떤 낯선 이가 오늘,

당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


그곳에서는

부디 밝고,

외롭지 않게

지내고 있기를 바랍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제 의견이 반드시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이 다를 수 있고, 제가 쓴 내용이 틀리거나 잘못된 정보일 수도 있습니다. 전문가가 아닌 한 명의 평범한 시민으로서 적은 글이니 너그럽게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다른 의견이 있으시더라도 비난이나 공격보다는

생각을 나눠주시면 기꺼이 경청하고,

당신의 생각이 맞다고 인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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