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의 창고
당신의 계절은 어디에서 멈춰 있나요?
“요즘도 약 없이는 잠을 못 자?”
꽤 대화가 잘 통하는 이가,
어느 날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오래전부터 스스로에게물어왔던 질문들이 떠올랐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잠을 ‘잘 수는 있지만’, 살아갈 수는 없었다.
약을 끊고 시도해 본 몇 날은
그저 멍하고, 흐릿하고, 무거웠다.
그다음엔 급격하게 기울었다.
집중력은 바닥나고,
기억은 쓸모를 잃고,
말의 맥락이 흐려졌다.
삶의 구조가 흩어졌다.
그리고 나는 다시 약을 삼켰다.
익숙한 시간, 익숙한 순서, 익숙한 무게로.
나는 매년 가을이면 아프다.
정확히 말하면, 9월과 10월.
추석 무렵에서 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할 즈음,
몸은 말하지 않아도 먼저 반응한다.
그게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무언가 더 오래된 기억이 깃든 리듬일까?
그 의문 하나로, 한밤중에 서랍을 뒤졌다.
먼지 쌓인 종이,
기억보다 오래된 종이들.
컴퓨터가 없던 시절, 수기로 적힌 병력 기록.
나는 1993년 7월생이고,
1997년 9월, 처음 병을 앓았다.
입원했고, 퇴원했고,
다시 1998년 1월, 병원으로 향했다.
1999년에는 조직검사를 받았다.
기록은 흐릿하고, 진단은 낡았지만
몸은 그 시기를 잊지 않은 듯했다.
그 이후로, 매년 같은 시기에
몸은 느리게 무너졌다.
내가 인식하기도 전에 먼저 무너졌다.
어쩌면 이건 병이 아니라
기억하는 몸의 자연스러운 반응인지도 모른다.
누구보다 먼저 나를 기억하는 건
언제나 나의 몸이었다.
나는 가끔 궁금해진다.
반 고흐는,
기형도는,
이상은,
다자이 오사무는
그들도 나처럼
이 작은 계절의 흔들림에 잠을 못 이루었을까?
심장 뛰는 소리,
초침이 흐르는 소리,
혈액이 흐르는 소리,
이름 없는 파열음들 속에서
그들도 밤을 건너고 있었을까?
나는 요즘 꽤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
다행히 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친구도 있다.
작지만 견고한 존재.
그 덕분에 조금은 더 단단히 하루를 붙든다.
그렇지만 여전히, 어떤 밤은 이렇게 흐려진다.
내가 멈춘 계절,
내가 시작된 계절,
내가 잊고 싶은 계절.
당신은 어떤 계절을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그리고,
그 기억은 당신의 몸 어디쯤에서 잠들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