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내면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경계선 Dec 28. 2020

우리 앞의 사랑.

영화 "자기 앞의 생"과 소설 "자기 앞의 생"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Romain Gary)"는 "에밀 아자르(Émile Ajar)"라는 필명으로 평생에 한 번 밖에 받을 수 없는 프랑스 문학상 공쿠르 상을 한번 더 받은 작가이다. 프랑스에서 유일무이하게 일어난 일로, 그가 죽고 나서야 두 이름이 동일 인물임이 밝혀졌다. 누구나 가지 않은 길을 동경한다. 한 번에 두 가지 인생을 살고 싶은 생각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일까. 로맹 가리가 단 하나의 자아를 더 만들어냈다면, 수많은 자아를 만들어냈던 페르난두 페소아는 정말 다채롭고 바쁘게 살다 간 사람일까 떠올려보게 된다.


언제나 좋은 작품을 읽고 나면 영화로 만나고 싶어 질 때가 있다. 그런데 그 영화가 또 안겨줄 실망감이랄 것이 무시할 수 없다는 것도 알기에 영화로 나와도 쭈뼛쭈뼛 망설이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차라리 영화를 먼저 보고, 그 작품을 책으로 읽으며 비교하는 편이 오히려 편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넷플릭스에서 개봉한 "자기 앞의 생"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로맹 가리의 소설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이다. 원작의 제목과 영화의 제목이 같다. 제목부터 얼마나 묵직하게 다가오는지 제법 오래전부터 기대해오던 소설이었다. "생生"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는 나에게 이 작품은 제목 때문에라도 이미 오래전부터 읽으려고 아껴두었던 소설이었다. 그때만 해도 로맹 가리가 살아갔던 시대를 알지 못했지만 "생"이라는 단어를 만나면 나는 실존주의 철학으로 연결하고 싶어 졌다.(나중에 알고 보니, 실존주의 철학이 등장했던 샤르트르와 비슷한 시대를 살았다.) 활자 대신에 화면으로 먼저 접할 수 있게 되었다니 기대하는 마음으로 스크랩해두고 한껏 깔끔해진 마음으로 커피 한 잔을 손에 쥐고 거실에서 넷플릭스를 켰다.

https://tv.naver.com/v/16403324

영화의 내용은 소설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으나 공간적 배경은 달랐다. 원작이 프랑스였다면 영화에서는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처음 드는 생각은 진정한 화해란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진정한 인정과 배려는 무엇이며, 서로에 대한 진정한 마음은 어떤 것일까 등이었다. 그리고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 생각은 사랑이라는 이름 앞에 가 닿았다. '사랑만이 우리 모두를 구제한다'는 어쩌면 이제는 지루하고 틀에 박힌 말처럼 보이는 그 문장의 강인함에 한참 동안 몸을 의탁했다.

주인공 로사 아주머니는 유대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아우슈비츠에 갇혔다 살아 나온 사람이었다. 그가 안고 있을 그 강력한 트라우마는 사실 그의 삶을 송두리째 갉아먹어도 시원찮을 것이었으나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살아가야 한다면 어떻게든 살아내는 것이 생에 대한 희망이자 의무라는 듯이 그는 낯선 이에게 선뜻 엉덩이를 내밀었을 것이며(책에서는 성매매를 '엉덩이로 먹고 산다'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그럼에도 사창가에서 태어날 수밖에 없었던(!) 가여운 생명들을 손수 거둬들였다. 그의 집에서는 아버지도(심지어 어머니도) 모르는 아이들이 괴롭고도 싱싱한 에너지를 뽐내며 하루가 다르게 웃자라고 있다. 그가 늙어가는 시간만큼이나 가파른 속도로 말이다.


참으로 슬프고도 희망적인 것은 그가 늙어가는 속도만큼 아이들은 커간다는 것이고, 그가 아이들이 가진 본래의 기질과 습성을 잘 가꿀 수 있도록 아이들을 손에서 놓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 로사 아주머니가 키우는 아이 중 모모는 회교도(이슬람교)이며 알제리 출신인지 어딘지도 모르는, 엄마는 아버지에게 살해당한 아이였다. 존재 자체의 혼란함으로 모모는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크고 작은 사고를 친다. 응당 자신이 그렇게 해야 사랑이 숨 쉬는 것처럼 말이다. 모모에게 큰 애착이 있었던 로사 아주머니는 모모에게 회교도로서 가져야 할 여러 덕목들을 가르치기 위해 또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모모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조금씩 깨달아간다. 그리고 모모는 생각보다 빨리 알게 되는데 그것은 로사 아주머니가 자신에게 보여주는 사랑의 모습이었다. 그가 받고 싶었던 그 많은 관심과 애정이 환상처럼 뭉쳐져서 보였던 암사자가, 실은 로사 아주머니였을런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마지막 순간 로사 아주머니가 죽는 순간에 모모도 긴 방황을 끝낼 수 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게 될는지도 모른다.


이별의 순간이 성장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진정한 사랑을 해 본 사람만 알 수 있는 가치 아닐까.

헤어져보면, 관계는 분명히 드러난다.

모모는 로사 아주머니를 쉽게 보내지 못했다. 모모는 마지막 순간 로사 아주머니가 그토록 원하던 지하 동굴(세계대전 당시 유대인들이 숨어서 지냈을 지하 동굴 같은 곳) 같은 곳에서 가장 안락한 시간을 함께 보냈다. 노란 미모사 꽃을 보며 두 사람이 함께 웃는 장면은 비현실적인 동화 같았다. 그 마지막 순간에 나는 보았다. 그 자체는 사랑이었다. 누군가를 길러내는 사랑, 누군가를 지켜주는 사랑, 누군가를 성장시키는 그 사랑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로사 아주머니가 죽기 직전의 마지막 순간에 누구보다 아름다운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했으며 모모에게 가장 큰 사랑을 힘껏 목숨과 같이 내어주었다고 생각했다.


길지 않은 90여분 가량의 러닝타임 동안 한참을 많은 생각과 고민으로 보냈다. 화면을 끄고도 제법 오랫동안 헤어날 수 없는 감상에 하루 정도를 더 머물렀다. 그리고 그다음 날 책으로도 연달아 읽었다. 사소로운 이야기의 틀은 약간씩 차이가 있었으나 작품의 큰 흐름이나 중요한 모티브 혹은 오브제는 같았다. 영화는 영화대로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을 그의 방법으로 보여주었고, 글은 사실 더 풍부한 감상과 상상을 더해주었다. 그리하여 책을 덮고는 한 이틀을 제법 오래 곱씹게 되었다.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문학동네, p.256

스스로 유대인으로서 회교도의 아이를 유대교로 개종시키지 않고 히브리어도 가르치지 않고 코란을 읽게 한 모모에 대한 배려.

아우슈비츠에서 그렇게 당하고도 사람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고 더 큰 사랑으로 자신의 삶을 던진 그 용기.

그리고 진창에서 엉덩이로 빌어먹고 사는 사람들을 가여워하며 베푼 그 정성과 헌신.

나는 이 모든 것들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었다고, 말하고 싶어 진다.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문학동네, p.311

누구나 각자 자기 앞에 놓여진 생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리고 누구나 묵묵히 생을 살아갈 것이다.  

그 생을 숨쉬게 하는 동력이 사랑일까 한다.

그래서 일까, 책의 마지막 문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사랑해야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원하는 것을 원하는 삶.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