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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선 Jan 13. 2022

사치

나희덕의 <가능주의자>를 읽는 오후.

나희덕의  시집을 읽으며 생각한다, 사치라는 단어에 대해.


혼자 왔지만, 달콤해 보이는 새하얀 케이크를 함께 주문하고 김이 올라오는 머그잔에 한가득 담긴 필터 커피의 향을 음미하는 날이다.

이런 여유가 늘 허락될 것만 같은 삶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좋은 창가 자리에 앉아 주섬주섬 책을 꺼내고 무거운 겨울 옷을 잠시 벗어두고 커피를 한 모금 하고보니

진정으로 이런 시간이 오랜만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시. 간. 은 오랜만이다.

(그러고보면, 나는 혼자인 시간을 즐기지만 그 혼자인 시간의 종류와 결도 다 다르고 그 다른 결과 종류를 모두 누리고 싶어 하는 욕심이 있다.)


아마 내 기억이 맞다면 그의 시집을 주문하고 손에 받아 찬찬히 글자의 한 획씩 씹어가며 읽는 느낌은 20년 만에 다시 처음인 것 같다.

패션도 20년 전의 패션이 돌아왔다더니, 내게 돌고 돌아온 것은 나희덕의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 이후 그의 조용한 '구호(口號)'같은 단어들이 돌아왔다.

20여 년의 시간 동안 시인은 여전히 변함없이 책을 내고 여전히 글을 써가고 있었지만 나는 많이도 변했고, 또한 어떤 기준에서는 제법 멀리 있었던 것 같다. 신작 시집이 나오고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우연히 유행처럼 내게 다시 나희덕 시인이 왔다.

그리고 애써 눈감고 있었던 많은 것들에 대해 시인은 조곤조곤 나를 밟고 눌러 납작하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마시고 있던 커피가 부끄러웠고, 입 속에서 녹고 있던 흰 생크림이 텁텁하게 느껴졌다.

옆 테이블에서 대화하는 소리마저 거북해졌다.

주문한 금액이 모두 만원이 조금 넘는 케이크와 커피라서 사치가 아니다.

돈 만원으로 밥 사 먹는 일 말고도 별 거리낌 없이 쓸 수 있는 돈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하던 내 마음이 사치스러웠다.

이 시간에 돈을 벌지 않고 "쓸" 시간이 있다는 것이 사치였다. 시간을 '소비'에 쓸 수 있어서 사치였다.


직접 발로 뛰고 고함치는 저항을 접어두고 고작 신작 시집 한 권을 통유리 안쪽의 따뜻한 공기와 조명 속에서 읽는 것으로

시인의 단호한 문장에 공감할 수 있다며 고개 끄덕이고 있어서 사치였다.


시집을 읽다 멍해지는 기분을 물리치며 날아든 핸드폰 문자에 집중력을 빼앗기며,

'아뿔싸 아직 자동차 보험 갱신을 안 했네.' 현실로 돌아와 할부로 보험 갱신을 하는,

내가 사치스러웠다. 손가락 몇 개만 움직이면 되는 삼성화재다이렉트 사이트도 사치스럽게 보였다.

결재 후 아무렇지 않게 날아드는 게임머니 같은 숫자의 몇십만 원 지출이 아무렇지 않은 내가 참 사치스러운데

더욱 같잖게 사치스러운 것은 핸드폰을 놓고 다시 시집을 읽다 울컥하는  마음이었다.


 속에 묻히기 위해 기어오르는 목숨이라니
- 나희덕, <가능주의자>에서 "매미에 대한 예의" 중


책을 읽다 때로 귀퉁이를 접어놓는 습관은 이제 고치고 싶은데도  되지 않는 것은

띠지를 들고 다니지 않는 불성실함과 무성의함 때문인데

유독 나희덕의 이번 시집에서 내가 접은 부분이 너무 많다.

누구에게 빌려주기도 힘든 책이 되어버린

그의 인식과 심상과 시 자체를 소유하기보다는

시집 자체만 소유한,

찍는데 의의를 두는 사진처럼,

캡처하는데 온 신경이 몰두된 삶을 사는

내가 참

사치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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