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는 한계를 깨달을 때,
나는 좌절하고 말았는데.
어떤 과학자는 겸허해졌다고 했다.
석박사를 취득한 학자들은 각자의 굴을 파고
뾰족하게 깊이 들어가기만 하니 세상으로부터 멀겠다 생각했다.
인간의 삶을 버리고 멀고 멀리 떨어져 더 높은 이론을 위해 달리다 보면.
그러나 각자가 파고 들어간 굴은 모두가 한 지점에서 만나
같은 색깔의 정수(精髓)를 뽑아 올리기도 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여기에도 있고, 여기에도 없다는 말장난 같은 문장은
문학에서 이야기하는 비유도 은유도 아니었다는 점.
무언가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점.
내가 보는 수많은 것들이 정확한 '실체'라기보다
나에 의해 규정되고 발견된 '객체'일 뿐이라는 점.
이런 이야기는 문학적 상상에만 있을 줄 알았는데.
인간의 언어로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것이,
양자 역학이라면,
이 학문을 공부한다는 행위 자체가,
그어진 한계 밑에서 한계를 인정하며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그저 받아들이는 학문이라는 점이,
새로운 대륙을 발견했을 때의 첫걸음과 같았을까 생각했다.
物理: 물성의 이치.
"세상 모든 것들은 물리로 설명할 수 있다."라고 중학교 시절 과학 선생이 이야기했다.
얼마나 가슴 뛰는 말이었는지.
세상 모든 것들을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이.
약간 고무된 얼굴로 문장을 말하던 그 선생의 얼굴에는 어떤 포부마저 보였는데.
그 선생의 목소리는 인간의 무한한 능력과 이성의 힘을 믿던 어느 시대의 당찬 발걸음 같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나는 인간이 지나온 흔적을 공부하며 그 '이성의 힘'의 실체를 어렴풋이 더듬었다.
그럼에도 나는 '인간의 능력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당위적으로 묘사하던
문학의 발걸음에 오랫동안 마음을 기울었다.
'당위'를 외치는 것은 아직 어딘가에 닿지 못했다는 뜻이었어도 상관없었다.
그리고 이제야 깨닫는다.
'당위'가 아닌 실체로 인간의 한계성을 단호한 이론으로 내놓은 물리학자의 굽어진 등이 얼마나 인문학적이었는지.
인문학도 아닌, 양자 역학이라는 이름으로 한 세기를 지나왔다는 사실이 얼마나 드라마 같은 건지.
그 이론으로 티브이도 보고, 컴퓨터도 하고, 핸드폰도 들고 다니는,
어디에도 나는 존재하고,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나와 현실의 나를 혼동하며 사는,
이 시간이 이 공간에서 얼마나 이동할 수 있는지 조차에는 관심도 없는,
그런 내가 때로 살아있기나 한 건지, 새삼 놀라운.
그 이론으로 모든 현대인의 삶을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다.
양자역학, 나는 그 낯설고도 매력적인 학문의 이름에
다짜고짜 궁금증을 품는다. 이해할 수 없더라도.
고전의 시대를 붕괴시킨 그 파괴적인 이론에 대해.
붕괴, 중첩, 불확정성.... 이해되지도 않는 용어들을
고양이(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동물 뒤에 숨긴 그 이론에 대해.
지울 수 없는 한 인간의 고유한 무늬(人文).
그 인문학의 끝에 세상을 설명하는 이치(物理)가 서 있었던 걸까.
문(文)과 리(理). 나는 그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만족스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