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어른이 되고만 싶었던
#고등학교
초등학교와 중학교 내내 성적은 나름 상위권이었다. 1990년대의 중반을 전후로 특목고(과학고, 외국어고)의 인기가 엄청났던 때였다. 학교 진학에 별다른 의미도 목적도 없이 그저 성적이 괜찮으니 들어가야 한다는 당위성만 존재하던 그때. 마치 유행에 뒤처지면 낙오자가 될까 봐 두려운 심리 같은 게 있었던 건가 싶기도 하고. 사실, 난 중학교 때 취미로 배운 악기가 너무 좋아서 외고가 아닌 예고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집에서 딸도 아닌 아들, 그것도 장남이란 이유로 취미로만 접하라는 부모님의 뜻에 가로막혀 제대로 배워보지도 못한 채 그만두게 되었다. 예고가 아닌 외고에 가라는 주문이 떨어졌다. 하고 싶은 걸 못하게 한 부모님을 탓하고 원망할 생각은 없다. 음악을 전공하고자 했던 내 의지는 그 벽 앞에서 쉽게 무너졌을 만큼 강하지도 않았던 거였고 재능이 탁월했던 것도 아니었을 테니.
아무튼 그렇게 전혀 적성과 뜻에 맞지도 않았던 외고 입시를 위해 내달린 중학교 3학년. 딴에는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입시 결과는 '불합격'. 한영외고, 대일외고 등과 같은 곳을 지원했으면 합격했었을 점수였다지만 대원외고를 향했던 나의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할 것 없이 그냥 준비가 부족했던 것이고, 딱 그만큼이 내 실력이었던 것이었겠지. 단순하게 아주 직관적으로 내가 빼어나게 공부를 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만 확인했다. 이게 내가 기억하는 여러 이벤트들 중에서 가장 상징적으로 남아있는 첫 실패와 첫 좌절이었음도 확실하다.
결국 집 근처 가까운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때마침 고등학교 입학 후 정부 발표에 따라 기존의 비교내신제가 폐지된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특목고 학생들의 내신 부담이 커지면서 재학생 상당 수가 자퇴를 단행하는 일이 벌어졌다. 아마도 내가 턱걸이로 간신히 합격했었더라도 자퇴를 선택하게 된 무리에 속하게 되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것이 자의이건 타의이건 간에 과도한 경쟁의 세계에 내몰려 우위를 점하지 못하게 되면서 무너지는 자존감과 자존심, 그로 인한 상처까지 덤으로 떠안게 되는 것을 피하자면 불가피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당시엔 인생의 첫 실패와 좌절이라 여겼던 그 사건이 오히려 내겐 불행 중 다행이었던 이벤트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남학생만 다니는 일반 공립고등학교. 학교의 학력 수준이 좀 낮은 편이었어서 가능했던 일이긴 했지만... 그 덕에 별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서도 고1 첫 시험에서 전교 1등을 했었다. 대원외고에 떨어져 평균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자각하고 스스로에게 별 기대도 없던 때에 이 결과는 굉장히 의외였다. 자존감 회복하라고 누가 내게 준 선물 같았다. 하지만, 나중에 알았다. 이건 독이든 성배와 다를 바 없었던 것이었음을... 비교내신제가 없어진 마당에 더욱 의미가 컸던 성과였고 소중하고 중요했던 첫 발걸음이었음을 잘 몰랐던 것도 문제지만, 너무 쉽게 얻었다고 생각했던 탓에 그냥 안주해 버린 게 더 큰 문제였다.
노력해도 유지할까 말까 한 학업. 내가 잘해도 남이 더 잘하면 언제든 그 순위는 뒤바뀌는 것이 당연한 건데 난 조금만 해도 압도적 1등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물론, 결과는 점진적으로 성적의 하락이 이어졌다. 1학년이야 어찌어찌 선행학습을 많이 해뒀던 탓에 일정 수준을 유지하며 지나갔지만, 2학년때부터는 확연히 달랐다. 내가 달라졌다기 보다도 주변 상황이 변했다. 갑자기 열심히 하게 되면서 성적이 오르는 친구도 있고, 학업에 진심으로 임하는 친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거꾸로 난 학업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만 관심이 늘어갔다. 사춘기가 이상한 시점에 아주 요란하게 왔던 것 같다. 이래저래 공부에 소홀해지면서 당연히 2학년부터는 전교가 아닌 반에서의 1등도 유지하기 쉽지 않았다.
외고 입시 실패를 통해 나 자신이 천재나 수재가 결코 아니었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됐음에도...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스스로를 아끼려고 하지 않았던 건지... 이제야 어렴풋이 알게 된 것은...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 그만큼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게 된다는 것. 그 의미와 가치를 제때 알기 어렵다는 것. 내게 있어 고교 첫 시험의 결과가 그러했다. 1등을 원하지도 않았거니와 기대도 안 했었는데 너무 쉽게 그 결과를 취하게 되다 보니 스스로를 우월한 존재로 착각하게 되면서 생긴 문제였음을 이제는 알 것 같다.
인생이 그렇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고 하는 것처럼, 늘 소중하고 중요한 것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데 대체로 간과하기 마련이고, 정작 꼭 잃게 되거나 어떤 문제가 발생하고 나서야 그 가치를 알게 된다는 것. 그리고 뒤늦게 후회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
(이어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