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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나우 Jul 23. 2023

여행 가고 싶다

Feat. 여행의 이유, 김영하 산문


1. 이번 주말에 여행 가자!



밤 9시 50분, 평소보다 20분 늦은 육퇴(육아퇴근) 후 소파에 널브러졌다. 머리는 멍하고 팔다리엔 힘이 안 들어갔다. 그토록 기다리던 자유시간이 왔건만, 이미 모든 체력과 정신력을 소진해 버렸다. 억울하고 허망하다. 무력감으로 깊은 한숨을 내뱉는데, 나와 똑같은 표정의 남편이 옆으로 다가왔다. 분리수거 양이 좀 많았는지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이다. 남편도 긴 한숨을 내쉬며 내 사타구니를 베고 누웠다.


"아, 힘들다. 민준이 칭얼대는 것 같던데 재우느라 힘들었지? 수고했어 나우나우야."

"오빠도 고생했어. 민준이, 좀 컸다고 이젠 잠 안 자고 놀겠다며 떼쓰네. 울다가 지쳐서 잠들었어."


짧은 대화를 끝으로 천장만 바라보다가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문장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여행 가고 싶어."


남편이 고개를 위로 꺾고 날 바라봤다.


"집, 회사, 집, 회사 너무 지겨워. 맨날 똑같아. 다른 곳, 새로운 곳으로 여행 가고 싶어."


남편이 동의한다는 표정과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디? 어디로 가고 싶어?"

"가까운 곳 어디든? 민준이도 데려가야 하는데 너무 멀면 힘드니까, 경기도 양평이나 김포 쪽?"

"이번 주말에 바로 갈까? 숙소 좀 찾아봐야겠다. 잠깐만.."


남편은 여행 가자는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어때' 앱을 켜고 숙소를 검색했다. 한숨 반 억울함 반으로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신나서 장단을 맞추는 남편 반응에 덩달아서 내 가슴도 설렜다. 진짜 이번 주말에 여행을 간다고? 파릇파릇한 나무랑 꽃도 보고, 맛있는 밥이랑 빵이랑 커피도 먹고, 쾌적한 호텔 침대에서 맥주도 마시고? 갑자기 머리가 맑아지고 팔다리에도 힘이 돌아왔다. 머리맡의 핸드폰을 끌어당겨서 나도 같이 숙소를 검색했다. 이제 막 앱을 켠 찰나에 남편이 말했다.


"화성 라비돌리조트, 여기 어때? 주니어 스위트로 조식 패키지가 싸게 나왔네."

"오, 수원 쪽이라서 위치도 가깝네. 방도 괜찮아 보이는데 용케 아직까지 자리가 남았네?"

"약간 변두리라서 근처에 놀 곳이 없어서 그런가 봐. 근데 우린 어차피 민준이 때문에 많이 못 돌아다니니까 괜찮을 듯."

"그래, 여기로 가자!"


'여행 가고 싶다'라고 말을 꺼낸 지 10분 만에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이틀 뒤 주말에 우리 가족은 경기도 화성으로 여행을 간다. 1박 2일 일정이니 자세한 계획은 출발 후 차 안에서 짜기로 했다. 어차피 아이와 함께 먹을 수 있는 밥집 -> 베이커리 카페 -> 근처 산책 -> 호텔 코스 일거다. 한참 뛰어다니기 좋아하는 21개월 아이와 함께할 수 있는 옵션은 많지 않다. 그래도 여행이다. 낯선 곳을 탐방하며 몸도 마음도 새로운 기운으로 충전되는 힐링의 시간!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번 주말이 무척 기다려진다.



2. 즐거운 여행길


호텔에선 언제나 삶이 리셋되는 기분이다. 집에는 일상의 고통과 괴로움의 흔적이 덕지덕지 묻어있다. 호텔은 그런 흔적이 전혀 없는 깨끗한 순백의 공간이다.

- 여행의 이유, 김영하 산문 (p. 66)


토요일 늦은 오후, 약 1시간쯤 운전해서 화성 라비돌리조트에 도착했다. 수원과 화성 변두리가 맞닿는 지점에 위치한 라비돌리조트는 경기도임에도 불구하고 한적한 시골 분위기를 풍겼다. 전체적으로 상아색 대리석과 벽지로 꾸며져서 깔끔한 톤앤매너를 추구했는데, 침대나 TV 등 가구는 오래된 티가 났다. 오래된 호텔을 리모델링한 것 같았다. 적당히 낡고 깨끗해서 오히려 개구쟁이 아이와 함께 지내기엔 맘 편해서 좋았다.


창 밖으로 초록색 골프장이 보였다. 짙은 녹색의 나무들 사이로 밝은 연둣빛의 잔디가 펼쳐져서 눈이 시원했다. 서울에서도 항상 보는 똑같은 나무와 풀이건만, 리조트 밖의 초목은 서울의 것보다 훨씬 푸르고 싱싱해 보였다. 여행을 온 것이 실감 났다. 마음이 가벼워지고 입가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조금 이른 저녁을 먹어야 할 것 같은데.. 나우나우,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남편의 물음에 고민했다.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음미하는 파스타와 리조또가 생각났다. 후식으로 달콤한 케이크와 따뜻한 커피를 마시면서 떠오르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는 상상을 했다. 생각만으로도 황홀하고 행복하다. 침대에 누워서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데, 아들 민준이가 침대 위로 기어올오더니 '엄마!'를 외치며 얼굴을 덮쳤다. 아 맞다, 민준이도 같이 먹어야 하지. 정신을 차리고 남편에게 대답했다.


"한정식집 가자. 민준이랑 다 같이 먹기에는 한식이 좋지."

"그래, 리조트 근처에 괜찮은 맛집이 있네. 여기로 예약할게."


이른 저녁을 먹으러 리조트 근처 '솔바람' 한정식집을 찾았다. 리조트와 마찬가지로 오래된 지역 맛집이었다. 아직 식사 시간 전이라서 식당 안은 한산했다. 덕분에 널찍한 6인상으로 안내받아서 아기 그릇과 장난감, 유튜브용 핸드폰 거치대까지 식탁 위를 여유롭게 사용했다. 음식은 정갈해서 어른과 아이가 함께 먹기 좋았다. 전채요리로 나온 호박전을 아이가 특히 맛있게 먹었는데, 그 모습을 본 주인아주머니께서 호박전을 추가로 가져다주셨다. 아이를 바라보는 아주머니의 눈빛이 친절하고 따뜻했다. 외식을 할 때면 혹시라도 '맘충' 소리를 들을까 봐 걱정돼서 아이의 작은 몸짓 하나에도 신경이 곤두섰는데, 아주머니의 눈빛을 보고서야 긴장이 풀렸다. 세상은 인터넷보다 훨씬 더 자상하고 너그럽다. 초보 엄마와 어린아이를 품어주는 어른의 배려 속에서 우리 가족은 행복하게 저녁 만찬을 즐겼다.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식당 옆 '보통저수지'로 이동했다. 짙은 파란색의 저수지 물 위로 연분홍빛 연꽃이 피어있었다. 진한 초록빛의 연닢들 사이로 분홍 꽃망울이 드문드문 보이는데, 저녁놀이 만드는 물빛의 반짝임과 어우러져서 동화같이 아름다웠다. 주말 저녁을 맞은 사람들의 여유로운 산책 걸음과 잘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우리 가족도 신나서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갔다.


"민준이, 아빠가 잡으러 간다!"

"꺄학!"


아들 민준이가 아빠를 피해 도망치면서 데크길을 질주했다. 결국 잡혀서 간지럽히기 벌칙을 받았다. 민준이의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주변 어른들의 시선을 끌었다. 아빠 목마를 타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귀엽게 바라보면서 혹여 부딪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길을 비켜줬다. 따뜻한 눈길과 배려를 받으면서 아이는 더욱 신나게 웃었다. 어른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내 몸과 마음이 뿌듯한 행복감으로 벅차올랐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주말이다.


주말 저녁의 화성 보통저수지 전경



3. 여행의 이유


여행은 고되고, 위험하며, 비용도 든다. 가만히 자기 집 소파에 드러누워 감자칩을 먹으며 텔러비전을 보는 게 돈도 안 들고 안전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안전하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한다. 거기서 우리 몸은 세상을 다시 느끼기 시작하고, 경험들은 연결되고 통합되며, 우리의 정신은 한껏 고양된다. 그렇게 고양된 정신으로 다시 어지러운 일상으로 복귀한다.

- 여행의 이유, 김영하 산문 (p. 205)


다음 날 아침, 엄마를 부르는 민준이 목소리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다가 눈앞이 핑 돌았다. 온몸이 땀에 젖어서 무거웠다. 어젯밤부터 으슬으슬 춥더니 결국 몸살에 걸렸다보다. 품 안으로 파고드는 민준이를 옆에 눕히고 나도 따라서 다시 누웠다. 분명 신나고 즐겁게 놀았었는데 왜 갑자기 아픈 거지? 요즘 회사 일이 바빴는데 주말까지 여행을 온건 좀 무리였나? 그래, 역시 집에서 쉬었어야 했어. 아플만하다는 것을 인식함과 동시에 머리가 어지럽고 몸 이곳저곳이 쑤시기 시작했다. 느낌이 별로 안 좋다.


"오빠, 일어났어? 나 몸이 좀 안 좋은데, 민준이 좀 안아줘."


옆 침대에 자고 있던 남편을 깨워서 놀자고 칭얼대는 민준이를 넘겼다. 남편은 비몽사몽 한 상태로 민준이를 놀아주다가 금세 지쳤다. 아이가 좋아하는 자동차 장난감을 손에 쥐어서 바닥에 내려놓은 뒤, 내 상태를 살피러 다가왔다.


"나우나우 괜찮아? 얼굴이 하얘."

"몸살이 왔나 봐. 오늘은 좀 쉬어야 할 것 같은데, 조식만 먹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자."


억지로 몸을 일으켜서 1층 레스토랑으로 갔다. 민준이 밥도 먹여야 하고 나도 탄수화물과 커피를 마시면 좀 나아질까 싶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참고 빵과 과일을 가져와서 먹었다. 달달한 게 들어가니 잠깐 나아지는가 싶었는데, 다 먹고 일어나려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품 안에 파고드는 아이의 몸무게가 훨씬 더 무거워졌다. 아무래도 단단히 몸살에 걸린 것 같다.


원래는 밥 먹고 보통저수지에 한 번 더 가려했었지만 지금 상태로는 무리다. 아이는커녕 내 몸도 제대로 못 챙길 판이다. 식당을 나오자마자 남편의 팔을 잡았다.


"오빠, 미안한데 오늘 오전엔 좀 쉬면 안 될까? 나 상태가 좀 안 좋아서 누워있고 싶어."

"진짜? 나우나우 무리했나 보다. 얼른 올라가서 쉬어, 나는 민준이랑 키즈룸에서 놀다 올라갈게. 민준이랑 있으면 편하게 쉬기 어렵잖아."


남편은 흔쾌히 혼자 아이를 돌볼 테니 걱정 말고 올라가서 쉬라고 말했다. 모처럼 온 여행인데 제대로 놀지도 못하다니.. 아픈 나 자신에게 화가 나고, 혼자 아이를 보겠다는 남편의 호의에 고마웠다. 기쁘면서 미안하고, 고마우면서 억울한 마음으로 힘 빠진 다리를 끌고 방으로 돌아왔다. 오자마자 침대에 대자로 뻗었다. 머리가 어질 해서 더 이상 서있을 수가 없었다. 더워서인지 아니면 식은땀인지 알 수 없는 물기를 느끼면서 죽은 듯이 잠들었다.


꿈속에서 반으로 잘린 귤을 봤다. 동그란 주황색이 빙글빙글 돌아가는데, 처음엔 하나였던 것이 두 개, 세 개가 되더니 나중엔 셀 수 없이 늘어나서 눈앞을 가득 채웠다. 기이한 광경이었지만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몸이 아파서 꿈을 꾸는 중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어려서부터 심한 감기를 앓을 때면 종종 꾸는 꿈이었다. 왜 하필 귤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귀엽고 친숙한 과일이 등장해서 다행이다. 만약 귀신이라면? 아플 때마다 반복되는 공포물이라니 끔찍하다.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귤이 모두 사라졌다. 어? 하면서 꿈에서 깼다.


현실의 내가 눈을 떴다. 땀으로 축축한 침대 위에 엎드려 있었다. 몸을 돌려서 바로 누워보니 눈앞이 또렷하다. 머리도 안 아프고 몸도 가볍게 돌아갔다. 팔을 뻗어서 휴대폰을 켜보니 벌써 오전 10시가 넘었다. 2시간을 넘게 잔 건가? 생각보다 늦은 시간에 급하게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어디야? 나 자다가 이제 일어났어. 많이 괜찮아진 것 같아."

"진짜? 다행이다. 나 민준이랑 키즈룸에서 축구하는 중이야. 우리밖에 없어서 엄청 신나게 놀고 있어. 조금 더 쉬고 있어, 체크인 전에 올라갈게."


또다시 느껴지는 기쁘면서도 미안한 감정. 다만 억울함은 사라지고 고마운 마음뿐이다. 몸도 마음도 가볍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베란다 밖 풍경을 바라봤다. 진한 하늘색 아래 짙고 연한 초록색 수풀이 우거진 그림 같은 전경. 창문을 열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시원한 바람에 짹짹 새소리가 실려왔다. 땀이 말라서 한결 상쾌해졌다. 눈과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맞아, 나 지금 여행 중이었지. 아, 너무 좋다.'


조금 뒤, 남편과 아이가 방으로 돌아왔다. 둘 다 땀범벅이다. 남편은 히- 웃고 있고, 아이는 엄마를 부르면서 달려와 안겼다. 남자아이의 건강한 땀 냄새가 났다. 주말, 여행, 함께 웃고 있는 가족. 너무 완벽한 장면이다. 완벽하게 행복하다.



4. 이전과 다른 일상


여행기란, 여행의 성공이라는 목적을 향해 집을 떠났던 주인공이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원래 성취하고자 했던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얻어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 여행의 이유, 김영하 산문 (p. 18)


집에 도착하니 오후 12시였다. 길이 안 막혀서 예상보다 빨리 왔다. 민준이는 낮잠에 빠졌다. 원래는 옷만 갈아입고 점심 먹으러 갈랬는데, 아이가 잠들었으니 계획은 전면 수정이다. 라면을 끓여서 남편과 간단하게 요기했다.


겨우 1박 여행임에도 불구하고 빨랫거리가 한가득 나왔다. 어른 옷 한 다발, 아이 옷 한 다발. 아이 옷부터 빨래를 돌리고 짐을 마저 풀었다. 청소기도 돌렸다. 혹시라도 아이가 깨면 다 같이 브런치를 먹으러 갈까 했는데, 민준이는 세상모르고 쿨쿨 잠만 잤다. 역시 여행이던 일상이던 맘대로 되는 건 없다.


잠든 아이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거실로 나왔다. 남편은 이미 소파에 누워서 TV를 보고 있었다. 그 위로 올라가서 남편 사타구니를 베고 누웠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함께 넷플릭스를 봤다. 그저께 밤에 보다 말았던 프로그램이다. 익숙한 배경음과 나레이션 목소리를 들으며 그저께 먹다 만 꼬깔콘을 집어 먹었다. 아주 평범하고 평화로운 일요일이다. 분명 두 시간 전까지만 해도 우린 여행 중이었는데, 마치 일주일 혹은 한 달은 지난 것 같다. 어제 리조트에서 뭘 했었는지 자세한 기억이 안 난다. 다만 굉장히 행복했던 감정만은 남았다.


감기약에 취한 건지 아니면 평화로움에 취한 건지 잠이 솔솔 왔다. 옆으로 돌아 누워서 남편 오른쪽 다리를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남편이 왼쪽 다리를 소파 등받침 위로 올리면서 공간을 만들어줬다. 나는 씩 웃으며 남편 다리에 뽀뽀를 해준 뒤, 넓어진 공간으로 몸을 편하게 기댔다. 다리에 기댄 얼굴과 배는 따뜻하고 에어컨 바람을 맞는 등과 다리는 시원했다. 더없이 완벽한 주말이다.


파란만장하면서 평화롭고, 힘들지만 즐거웠던 여행이었다. 특별한 건 없었다. 밥 먹기, 산책하기, 잠자기 루틴을 리조트에서 한 것일 뿐,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여행과 똑같은 일상이 시작됐다. 다만 반복되는 일상이 조금 덜 지루해진 점이 여행의 성과랄까? 내게 소파 공간을 양보하는 남편이 좀 더 멋져 보이고, 방 안에서 평화롭게 낮잠을 자는 아들은 어제보다 더 사랑스럽다. 그들과 함께하는 나 자신도 조금 더 행복해진 것 같다.


오늘도 어제와 같은 일상이다. 어제처럼 예측 불가능하고 어제만큼 행복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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