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집 '업사이클링' 프로그램 공문을 받았다. 쓰레기를 줄이고 자원을 재활용하여 환경보호를 몸소 실천하는 가정 연계 활동. 우유곽, 휴지심, 음료수병 등 일상생활에서 배출된 여러 가지 폐품을 활용해서 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장난감을 만들어보는 자율 참여 프로그램. 참가 희망자는 기한 내에 작품을 만들어서 어린이집에 제출하고, 선생님 & 아이들이 직접 투표해서 TOP 5를 뽑는 이벤트. 3040에게 익숙한 용어로는 '폐품 장난감 만들기 대회'다.
수요일 오후 2시, 회사에서 키즈노트에 올라온 공지사항을 읽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득한 추억 속 초등학교가 떠올랐다. 폐품 만들기 참 많이 했었는데. 어느새 세월이 흘러서 우리 아들의 만들기 숙제를 받았구나. 요샌 폐품이 아니라 업사이클링이라고 하나 보네. 자율 참가라지만, 우리 애만 안 해가면 어떡하지? 다들 자기 집에서 만든 작품을 전시하고 좋아할 때, 우리 민준이만 멍하니 있는 건 아닐까? 역시 우리도 참가해야겠다. 우선 폐품부터 모아야겠구나.
핸드폰을 켜서 남편, 친정, 시댁에 카톡 메시지를 넣었다.
'어린이집 폐품 만들기 대회에 참가합니다. 각자 집의 폐품을 깨끗이 씻어서 모아주세요. 작품으로 승화시켜서 좋은 결과 만들어보겠습니다.'
어린이집 업사이클링 활동 안내 공지사항
2. 엄마 이과 출신이다
작품 제출일까지 남은 기간은 3주. 뭘 만들까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포기했다. 어차피 기간도 많이 남았고, 어떤 재활용품이 모일지 예측할 수 없었다. 일과 육아를 넘나드는 바쁜 일상에서 내가 원하는 생활 재활용품까지 챙길 여유가 없었다. 그냥 현생에 집중했다가 나중에 모인 폐품 종류를 보고 작품 주제를 결정해야겠다. 이래 봬도 엄마가 소싯적 과학자를 꿈꾸던 이과 출신이다. 그깟 폐품 만들기, 걱정 마라 아들아!
그렇게 3주 간의 37살 부모 숙제가 시작됐다. 집/회사/일/육아의 정신없는 루틴 속에서 가끔 미뤄둔 숙제가 생각났다.
'아, 맞다. 제출일까지 얼마나 남았지? 이제 슬슬 뭐 만들지 정도는 생각해봐야 하는데.'
잠시 주제를 고민하노라면 금세 다른 일이 생겼다. 상사가 급하게 나를 찾거나, 아이가 칭얼거리거나 아니면 사고 치는 소리가 들렸다. 창의적인 상상력은 맑고 고요한 집중 상태에서 나온다는데, 그런 기회를 갖기엔 현생이 너무 바빴다. 결국 어떻게든 되겠지란 현실회피와 미루기 스킬을 시전 했다. 마음이 불편할 때면 옆에 있던 남편을 괴롭혔다.혼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던 남편은 갑작스러운 날벼락에 억울했으나, 곧바로 이유를 알아채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생한다는 남편의 위로를 받으면서 불편한 압박감을 조금씩 진정시켰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3주 동안 우리 집과 친정 그리고 시댁의 재활용품 바구니가 점점 채워졌다. 내 부담감과 책임감도 점점 무거워졌다. 만들기 이벤트 마감일은 점점 더 다가왔다.
3. 토요일, 부모 숙제의 밤
업사이클링 작품 제출일 D -1 day. 아니, 이미 점심도 다 지났으니 잠자기 전까지 대략 8시간 정도 남았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순간이 다가왔다. 이젠 숙제를 할 시간이다.
친정과 시댁을 들러서 모아주신 재활용품을 수거했다. 휴지심, 병뚜껑, 우유곽, 과자 상자. 비슷한 살림살이에서 비슷한 재활용품이 나온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세 집의 폐품을 모았지만, 결국 다양성보단 양 많고 고만고만한 종류의 재료가 모였다.
이걸로 뭘 만들면 좋을까?원기둥 같은 휴지심이 여러 개니까, 쌓아서 집이나 성을 만들어볼까? 아니면 우유곽에 요구르트 병을 팔다리로 붙여서 로봇을 만들어볼까? 초등학교 때 이런 거 정말 많이 했었는데. 벌써 어른이 돼서 아들의 만들기 숙제를 해주고 있구나. 귀찮은 마음으로 시작했던 부모 숙제가 어느새 그리운 추억의 놀이로 느껴졌다. 내 일처럼 집중했다.
뭔가 딱 이거다 하는 아이디어가 떠오르질 않았다. 번뜩이는 아이디어 하나만 있으면 만드는 건 순식간일 것 같은데, 지난 30년 동안 너무 쉬어서인지 어릴 때처럼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배경음으로 틀어둔 TV만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TV 서랍장 위에 아들이 늘여놓은 자동차 장난감이 눈에 띄었다. '빠방!' 소리를 내면서 신나게 굴리며 놀던 아이의 모습이 생각났다. 순간 머리가 환해졌다. 매일 들어서 익숙해진 만화 '핑크퐁'의 노랫말이 떠올랐다.
'우리는 힘이 센 중장비 차, 무거운 공사 일은 내게 맡겨요!'
그토록 기다리던 아이디어가 강림했다. 계시를 받은 손이 저절로 움직였고, 1시간도 안 돼서 작품 하나를 뚝딱 창조했다. 30년 전 어린아이 시절처럼 집중했고, 그때만큼 즐거운 시간이었다. 완성된 작품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뿌듯한 마음으로 아들의 이름을 딴 작품명을 지어줬다.
업사이클링 출품작 : 민준's 포크레인
4. 25년 만에 받은 최우수상
만들기 작품을 제출한 후, 은근한 기대감에 부풀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제작 과정은 즐거웠고 결과물 퀄리티도 자신 있었다. 출품작은 한데 모아서 어린이집 학부모와 원생 아이들의 투표를 거친 뒤, 표결 값에 따라서 최우수/우수/장려/참가상으로 나뉜다고 했다. 아이는 물론 하원을 도와주는 친정엄마의 소중한 두 표를 확보한 후, 최종 결과가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만들기 숙제 제출 후 5일째 되는 금요일 저녁, 키즈노트 공지사항 알림이 울렸다.
8월 업사이클링 프로그램 진행 결과 - 최우수상: 1세반 민준 (6표) - 우수상: A(5표), B(5표) - 장려상: C(3표), D(4표), E(3표)
오오, 근 25년 만에 받아보는 상장! '참 잘했어요'를 뛰어넘은 '제일 잘했어요'의 최우수상! 나 아직 안 죽었구나! 어른 체면도 잊은 채 육성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즉시 공지사항 화면을 캡처해서 친정과 시댁 가족 카톡방에 공유했다.
'대박! 우리 민준이 최우수상!'
'잘 만들긴 했더라 ㅋㅋㅋㅋ'
'나중에 우리 애 숙제도 부탁해.'
우수수 올라오는 축하 메시지를 받으면서 민준이 대신 민준엄마의 자부심이 차올랐다. 중학교 이후 까맣게 잊고 있던 미술활동의 재미와 보람이 생각났다. 그래 맞아, 나 미술시간 정말 좋아했었어. 그림도 잘 그리고 만들기도 곧잘 해서 상도 많이 탔었지. 공부하고 취업해서 어른으로 사는 동안 이 즐거움을 잊고 살았구나. 민준이를 낳고 부모가 되어서야, 아이의 성장과 함께 내 어린 시절의 추억도 다시 한번 복기할 수 있는 거구나. 고맙다 민준아.
엄마의 환호성을 듣고 뛰어온 민준이를 번쩍 안아 올렸다. 품에 꼭 안고 '민준이가 1등이야!'를 말해줬다. 1등이란 단어를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엄마가 신나 하니까 자신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는지, 민준이도 환하게 웃으며 나를 꼭 안았다. 우리는 개선장군처럼 위풍당당하게 거실로 나갔다. 카톡 메시지를 받은 남편이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우리 세 명 모두 자신감에 고무됐다. 참행복한 금요일 밤이다.
다음 주 월요일엔 어린이집에서 시상식이 열린다. 우리 아이는 시상식의 주인공으로써, 가장 많은 축하를 받으며 첫 상장의 기쁨을 누릴 것이다. 아이의 첫 시상이 기쁘고 행복한 기억으로 쌓이길 바란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내 아이도 그림 그리기와 만들기를 좋아하는 어린이로 성장하면 좋겠다. 나보다 더 미술을 좋아하고 그 즐거움을 오래도록 누릴 수 있는, 마음이 여유로운 사람으로 자라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