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어느 날, 정말 오랜만에 천근만근 지친 몸을 이끌고 호주 여행을 떠났다. 별로 선호하지 않는 패키지여행에 남편의 지인 가족 두 팀까지 함께하는 여행인지라 나는 별 기대가 없었다. 사실 그 전주까지 감정이 날뛰어 “나는 안 가면 안 돼?” 하고 눈물 질질 짰던 나였다. 하필 지구 반대편이라 날씨도 반대라서 옷도 다 뒤져서 발굴해야 했다. 나는 대충 입는다 쳐도 줄줄이 나만 바라보고 있는 우리 집 남자 4종 세트의 옷이며 신발이며 세면도구까지 챙겨야 하는 나로서는 차라리 방콕이 낫지 싶었다. 그래도 남편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나는 아들들의 멘탈 보호를 위해 꾸역꾸역 구역 옷을 싸고 신발을 싸고 세면도구를 싸고 책을 쌌다. 그렇다. 나는 여행지에서의 독서를 로망으로 삼는 그런 센티멘탈한 아줌마인 것이다.
긴 비행 끝에 우리는 핼쑥해진 모습으로 호주 땅을 밟았고, 여전히 어색하고 어려운 관문을 거친 후 드디어 호주의 강렬한 햇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아~ 이 청정한 공기 같으니라고! 폐가 깜짝 놀랄 만큼 후텁지근 하구만.
우리의 비행기는 이른 아침 도착이었고, 우리는 그날 하루 종일 동물원이며 어디며 끌려다녀야 했고, 우리의 점심은 영국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은 나라답게 기름진 피쉬앤칩스였어야만 했다. 도착과 동시에 들이붓게 된 콜라는 우리의 소울푸드가 되었고 롯데리아에서 단품으로만 사 먹어서 거의 못 먹어봤던 감차칩은 주메뉴가 되었다. 얇은 감자칩, 뚱뚱한 감자칩, 짠 감자칩, 심심한 감자칩, 가끔 으깬 감자로 변주된 요리로 나오기도 했었다.
하루 종일 더운 날씨에 굴려진 우리는 숙소라고 하기엔 아무리 봐도 너무 거친 것 같은 공장지대에 모셔졌고, 휴일임에도 산뜻하게 우리를 맞아주는 한국인 출신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호주 양털 이불 회사에 도착해 있었다.
“털이 살아있네!” 이불 사이 들어있는 뭔가 살랑살랑한 느낌의 양털을 구경하며 들어간 널따란 공간에 들어선 순간! “와~ 이쁘다~” 초록색 양모 카펫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 나는 초록색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초록 바라기이다. 뭔가 강렬한 촉이 왔다. 진한 초록 양모 카펫, 연두색 양모 카펫. 보송보송 양모 카펫. 느낌 좋고~ 설명 좋고~ 남편을 바라봤다. 무엇도 예상치 못한 듯한 피로에 찌든 표정. 눈을 마주치고 씩 웃으며 손을 든다. 번쩍!
“저는 이 연두색 양모 카펫을 사고 싶습니다!” 남편이 동공이 풀린다. 흠…. 이제 나의 할 일은 끝이다. 나는 남편의 권유로 카드 한 장 안 들고 왔으니 할 일이 없다. 남편의 일밖에. 아저씨의 손에 이끌려 책상 앞에 앉는 남편. 예의상 같이 따라가 주기는 한다.
“아유~ 좋은 걸 아시네~ 어떻게 더블로 드려요? 둘이 같이 까시면 아주 좋아요~. 아들이 사춘기죠? 사춘기 아들 등에 여드름 날 때 깔아주면 아주 좋아요~”
“아니요! 딱 제 것만 살 건데요? 저 혼자 쓸 거요. 싱글로 주세요! 여보. 계산해~ 그리고 내 꺼 넘보지 마슈~” 샤랄라라라라라라라~
같이 간 세 집 중에 우리 집이 제일 가난하다. 우리 집만 아이가 셋이고 우리 애들이 제일 많이 먹고 제일 사고를 많이 친다. 하지만 나는 호주 도착한 날, 제일 비싼 기념품을 결재하는 것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아주 상큼한 여행의 시작이었다. 지금 그 연두색 양모 카펫은 아무도 넘보지 못하는 내 전용 카펫이다. 덤으로 얹어주신 양모 이불과 함께 덮고 깔고 자면 꿀잠 보장이다. 참으로 현명한 선택이었고 참으로 즐거운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