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길 가면 애를 혼자 보지 않아도 되잖아요.

by 우아

나는 이제까지, 유럽 여행을 세 번 다녀왔다. 한번은 뭣 모르던 초임 시절, 잘 쌓이고 있던 적금을 깨서 대학 친구와 무작정 떠났던 유럽 5개국 순방 여행. 그 여행은 그냥 잊기로 한다. 친구와 떠났다는 것에서부터, 5개국 순방 여행에서부터 예상이 되었던 그 여행의 후기는 간단하다. 싸우고 끝났다. 대판 싸우진 못했다. 성격대로 그냥 슬금슬금 서운할 정도로 싸우고 헤어졌다. 남은 건 내가 거길 다녀왔었다, 더웠었다, 힘들었었다 꼭 다시 가서 산뜻하게 기억을 리셋하고 돌아와야 할 곳이다, 정도.

묵직한 두건은 모두 결혼 후, 아이를 낳고 떠난 여행이다. 한번은 둘째를 낳고 7개월 만에 떠난 크로아티아 여행, 또 한 번은 셋째를 낳고 12개월이 조금 안 되어 떠난 스페인 여행. 여행 좋아하시는 분은 느낌이 딱 올 것이다. 아이들의 개월 수! 그렇다. 아이가 12개월이 넘으면 온전한 인간, 1인의 비행기 푯값을 내야 한다. 그래서 젖도 못 뗀 떡애기들을 데리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오해는 금물이다. ‘부자인가 봐~ 해외여행을, 그것도 유럽 여행을 마구 가는구나~’ 오해다. 나는 첫째 때도, 둘째 때도, 셋째 때도 이번이 마지막이니 미래의 돈을 끌어다 쓰더라도 휴직을 하며 아이를 내 손으로 키우겠노라며 무모한 휴직을 감행한 아줌마다. 물론, 셋째 때는 아니할 수가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 휴직을 했고, 더더더더 먼 미래의 돈을 끌어다 쓰고 있던 처지였다. 그런 재정 상태에서 여행이 가당키나 하냔 말이다. 그 여행은 기회비용 운운하며 나를 꼬신 남편의 눈 가리고 아웅식의 그런 자아실현을 위함이었다. 복직하면 날씨 좋을 때 못 간다는 이유를 들며, 아이의 비행깃값을 계산기로 두들겨 가며, 출산 후 몸도 다 회복되지 않은 나를 꼬셔 놀러 갈 계획에 신났던 나의 남편의 자기만족이었다.

때는 박00 정부의 4월 어느 날. 이왕 가는 거 날씨 좋은 날로 비행기 표를 끊어 놓은 우리를 우롱이라도 하듯, 따뜻한 봄날, 노란 개나리같이 생기발랄하던 고등학생들이 한꺼번에 노랑나비가 되어 떠나버린 세월호 사건이 터졌다. 온 나라가 난리였다. 매일 같이 쏟아지는 뉴스를 안 볼 수도, 보고 있을 수만도 없던 그런 나날들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왜? 공무원들이 비행기를 못 타느냐였다. 게다가 나는 휴직 중인 그냥 이름만 공무원인 유령공무원이었는데 공무원 여행 금지에 발목이 잡혔다. 나의 직속상관은 돈 한 푼 갚아줄 것도 아니면서 무작정 비행기를 못 타게 했다. 그리하여 반항심 깊은 산후 아줌마는 “냅 둬요! 내 맘대로 할 거예요! 이놈의 나라 시끄럽고 서러워서 못 있겠어요!” 하고 무작정 비행기를 타고 떠났다.

음~ 얼마나 고요하고 평화롭던지. 여기저기 곡소리뿐이던 나라를 잠시 벗어났을 뿐인데 마음에 진정한 평화가 깃들었다. 지나가는 새가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흐르는 물이 내게 인사하는 것 같았다. 하늘의 구름이 손짓하는 것 같았다. “이리와~ 잘 왔어~ 너에게 평안을 줄게~” 물론, 몸은 편치 않았다. 아이를 둘이나 데리고 가는 우리에게 호텔은 적합하지 않았다. 주인이 직접 와서 열쇠를 건네주는 유럽식 아파트먼트를 구해 도착과 동시에 방바닥을 전투적으로 닦는 일로 그 도시의 일정을 시작하는 고된 여정이었다. 그때 우리 둘째가 마~침 빡빡 기어다니는 7개월이었다. 냉동 이유식, 건조된 이유식, 곱게 간 쌀 등은 기본이요, 김치와 김, 멸치 등 밑반찬까지 싸 간 우리는 아니! 나는 물까지도 끓여 먹이는 극성 엄마였다. 아침, 저녁은 거의 해 먹었고, 가는 곳마다 빨래를 해 너실너실 널며 흐뭇해했다. 자유 여행이었기에 늦잠을 자고 싶으면 늦잠을 자고 나가고 싶으면 나가면 되는 거였다. 동네 시장에서 갓 구운 빵이며, 빨간 고무 그릇에 담긴 딸기며, 예쁘게 진열된 식료품이며 이것저것 사다가 쌀밥과 김치와 함께 먹으면 되는 거였다. 그것이 여행이었고, 그것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방법이었다. 구글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숙소를 찾아가는 무모한 일정도 ‘될 대로 되어라, 오늘 안에 애들 뉘일 곳만 찾으면 된다’라는 태평한 마음으로 길가의 들꽃에 눈길 주다 보면 그냥 목적지에 닿아있고 나는 또 방을 닦으면 되는 그런 여행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무대포 여행을 무려 16일이나 했다. 가는 곳마다, 그곳이 유명한 대성당이든, 고즈넉한 관광지이든, 여러 개의 별이 번쩍이는 음식점이든 때가 되면 나는 노천 수유를 능숙하게 해내었고 아주 자연스럽게 사진에 찍혀 있다. 내가 말해주지 않으면 쭈쭈 먹던 당사자도 모르게 아주 자연스럽다. 사진상의 나는 프로패셔널한 엄마처럼 보였다.

여행 마지막 3일은 크로아티아의 드브로부니크 성 근처에 있는 로크럼 섬까지 배 타고 가서 칠면조와 함께하는, 그저 앉아 있고 서 있고 좀 걷는 그런 한량 같은 시간을 보내고 왔으니 말 다했지. 정말 자유로운 여행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우리에겐 이제 갓 7개월이 된 남자아이와 이제 갓 37개월이 된 남자아이가 한 명 더 있었기 때문이다. 남들이 들으면 “그 돈 들여서 가서 그러고 왔다고?” 하겠지만 우린 참 만족스러웠다. 아이들이 공작새를 친구로 여기게 되었으니, 제 손에 쥔 퍽퍽한 빵을 기꺼이 새에게 내어줄 수 있게 되었으니, 바다의 잔잔한 파도 소리를 들으며 어여쁜 몽돌을 쥐었다 놓았다 하는 아이들을 눈에 담을 수 있었으니, 그것으로 좋았다.

아침마다 숙소를 지나는 한국인 아줌마들의 각종 사투리를 들으며 눈뜨는 기분도 괜찮았다. 한국인 종특으로 어찌나 부지런들 하신 지. 성곽 투어를 새벽부터 하신다.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각처에서 오신 우리 어머님들의 구수한 감탄사는 육아에 지쳐 아침잠이 모자라는 육아맘을 깨우는 유쾌한 자명종 역할을 톡톡히 해냈었다. 영화에서 나오는 그런 나무 창문을 열면 바로 옆을 지나시던 한국인 아줌마들이 각종 사투리로 놀라시곤 했었다. “아이구야, 아구메, 으메,” 등등. 큰아들의 재미난 놀이 중 하나였었다.

하나의 부작용이 있었다면 나의 성실한 수유로 인해 우량아가 된 둘째를 들쳐 메고 다니느라 혹사당한 나의 두 발바닥에 생긴 족저근막염이 끈질지게 추억처럼 여전히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점? 그래도 참 즐거웠다. 진짜, 정말, 너무 좋았다.

두 번째 무모한 도전은 스페인이다. 이번엔 미취학 애가 셋이다. 7짤, 5짤, 막 2짤. 15일 일정이고. 그래서 한 분을 더 모셨다. 나의 둘째 시누이. 같이 가주신다는 게 어디냐. 감사히 모시고 갔다. 스페인은 열정의 나라! 내가 더 열정적일걸? 가는 곳마다 밥과 청소와 빨래는 당연하고 유모차와 애들 단속까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스페인 음식이 입에 맞는 사람은 딱 한 사람, 남편뿐이었고 점심은 거의 패스트푸드였고, 그래서 아침과 저녁 한식은 귀하고 귀했다.

그곳에서도 나는 셋째 모유 수유 장면을 번번이 도촬 당했다. 그리하여 나는 수유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게 된다.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 대성당, 세비야 대성당, 바르셀로나 성 파밀리아 성당. 이 세 곳에서 나는 당당하게 수유를 하고 있었다. 어디 자랑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엄마로서 자긍심을 가질만하다고 생각은 하고 싶다. 뭔 극성인가 싶지만 나 스스로라도 그런 나를 칭찬해 주고 싶다. “잘했어! 넌 정말 좋은 엄마야!”

스페인에 있을 때, 유독 활발한 둘째는 왼팔이 부러져 초록색 통깁스를 한 상태였다. 머리는 뽀글 머리였고, 그 유명한 가우디의 카사 바트요 건물 앞 벤치에 나란히 앉아, 통깁스 안의 간지러운 부분을 볼펜을 이용해 살뜰하게 긁어주는 애정 가득한 엄마와 슬쩍슬쩍 위치를 바꿔가며 간지러움을 해결해 가는 표정 부자 아들이 사진으로 남겨졌다. 우리의 여행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젊은 커플이 곱게 차려입고 예쁜 표정과 포즈로 사진 찍을 때, 우리는 뒤뚱뒤뚱 걷는 동생의 뒤를 쫓는 형의 일상 사진이 담겼다. 걷다 지친 아이들이 도미솔처럼 나란히 앉아 물을 마시는 장면이 담겼다. 서로 ‘나 잡아 봐라’를 시전하며 술래 없는 술래잡기를 하는 장면이 담겼다. 그 배경이 가우디의 성 파밀리아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유리창일 뿐이다. 세비야 대성당의 콜럼버스의 관일 뿐이다. 정열적으로 탱고를 추는 남녀일 뿐이다. 소원을 이루게 해준다는 검은 마리아일 뿐이다. 우리는 그렇게 추억을 남겼다. 흔적을 남겼다. 웃음을 남겼다.

사람들은 나에게 참 대단하다고 했다. 어떻게 어린 애들을 데리고 거기까지 갈 생각을 하느냐고. 그 긴 비행시간을 어떻게 버티고, 애들을 데리고 이동하고 먹이고 재우고 그게 여행이 되느냐고. 그럼 늘상 독박 육아에 허덕이던 내 대답은 명확히 하나였다.

“거길 가면 애를 혼자 보지 않아도 되잖아요.”

이해가 선뜻 되지 않는다면 독박 육아의 ‘독’자도 모르는 사람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그대. 굳이 이해하려 하지 마라. 지금 그대로가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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