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남녀공학 고등학교를 나왔다. 내 살던 곳에서 유일한 인문계 남녀고등학교였다. 살던 집에서 정반대 쪽에 있던 곳이었다. 집 옆에는 번듯한 여고가 있었다. 그런데 왜 남녀공학을 갔느냐 물으신다면 그때 당시 그 학교의 여학생 대학 진학률이 아주 높았다. 이유라면 그것이라 하겠다.
통학버스를 타야 하는 나는 아침마다 전쟁이었다. 긴 머리는 왜 아침에 감았어야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침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로, 한겨울에는 고드름을 단 채로 통학버스를 겨우 타고 학교에 다녔었다. 청춘이었다. 머리를 말리지 않아도 머리가 시립지 않다는 건 참 축복이었던 것 같다. 당연히 남녀공학이니 통학버스 안에는 남학생들도 많았다. 나는 개의치 않았다. 학교에 무사히 갈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곳은 우리 학교 통학버스만 정차하는 곳이 아니었다. 더 먼 곳에 있는 남학교의 통학버스를 타는 곳이기도 했다. 고로 아침마다 길고도 긴 머리를 물방울 흩날리며 질주하는 나의 모습을 같은 동네 사는 수많은 남학생이 목격했다는 사실을 졸업 후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그때 당시 목격자 중 1인으로부터 직접 듣기도 했었다. 부끄러움이 많았던 것과는 별개로 별로 남을 신경 쓰고 살지 않았던 것 같다.
고등학교 2학년 야간자율학습 시간. 그 당시 담임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교실이 1층이었던지, 중앙현관 대형 거울 뒤쪽에서 잠깐 상담 비슷한 걸 한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묘한 기분을 느낀다. 여자의 직감이랄까?
“주말에 시간 있을 때 뭐하니?”
“음…. 잠도 자고, 텔레비전도 보고, 책도 읽고, 피아노도 쳐요.”
사실대로 말했을 뿐인데 뭐가 맘에 안 드셨을까나. 선생님의 표정에서 가소롭다는 생각을 읽어낸다. 아니라면 말고. 서울 명문여대 나오신 선생님이 보시기에 어린 여제자의 대답이 별로 마음에 안 드신 표정이 역력했다. 진한 화장을 하신 여선생님과 화장기 하나 없던 민들민들한 내 얼굴의 대조감이 아주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3년 내내 나를 보신 분이신데, 원서 쓸 때쯤에서야 우리 집 형편이 별로 안 좋다는 걸 아시고는 한마디 하셨다.
“나는 네가 부잣집 딸인 줄 알았다?” 진심이신 듯했다. 그게 무슨 의미이신지? 묘한 반발심이 생겼었던 것 같다.
슬슬 나는 남들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내 주변 공기를 읽게 된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남녀공학인데 나에게 관심을 보인 남학생 하나 없었겠나. 몰랐다. 용감하게 들이댄 건 딱 한 명 있었다. 나머지는 몰랐다. 그걸 선생님들은 아셨겠지. 호박씨 정도로 아셨으려나? 선생님들의 기대나 선생님들의 평판 같은 것도 별 관심 없었다. 그저 이 선생님이 어떤 과를 추천해 주셨고, 저 선생님이 따로 불러 진학 상담을 해주셨었던 것을, 그냥 모두에게 주는 공평한 관심과 기회 거니 생각했었다. 그런 선생님들을 의식하기엔 너무 늦었었다. 나는 곧 졸업이었다.
사회에 나와 직업인이 되었다. 부끄러움이 많았을 뿐인데 사람들은 나를 차가운 여자라 느꼈다. 뭔가 다가가기 어렵다나 뭐라나. 그래서 나 스스로가 허들을 낮췄다. 얼굴에 미소를 장착하고 친절한 몸짓과 말투, 오지랖을 장착했다. 약간의 푼수기를 가미했다. 가면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밖에서의 나와 집에서의 나는 텐션이 달랐다. 피곤한 인생이 되어버렸다.
그랬더니 이번엔 사람들이 선을 넘기 시작한다. 외모와 텐션의 갭에서 오는 간극에서 허점을 찾은 것일까. 자꾸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억울한 일을 겪게 되었다. 마음 고생을 하게 되었다.
오랜 시간 나와 함께 한 가면은 진짜 나인 듯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진짜 나라도 되는 것처럼. 그럼 내 안의 진짜였던 나는 부대끼고 속상하다. 오십을 향해가는 나는 근 삼십 년간 써오던 친절 호들갑 가면이 부담스럽다. 내려놓고 싶다. 좀 더 편안해지고 싶어졌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건데?’ 사춘기 때도 이보다 치열하진 않았을 거다. 사람과 부대끼고 사람에게 상처받고 무너지고 깨달으면서 나는 진짜 나를 찾아가기로 했다.
‘우아하고 기품 있는 사람’
나는 말과 행동과 생각과 마음 모두가 우아하고 기품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우아하고 기품 있게 앉고 우아하고 기품 있게 대화하고 우아하고 기품 있게 먹고 우아하고 기품 있게 행동하는 그런 사람. ‘우아하고 기품 있다’의 기준이 뭐냐고 물으면 그 기준은 나를 만족시키기만 하면 된다. 남들이 기준이 아니라 내가 느끼기에 우아하고 기품 있으면 된다. 내가 우아하고 기품 있다고 느끼면 된다. 더 이상 남을 의식하고 남에게 보이기 위해 애쓰면서 살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그래서 남들이 나를 함부로 대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으면 한다. 내가 나를 우아하고 기품 있다고 인정하면 남들이 뭐라 하든 괜찮을 것 같다. 남의 눈이 아닌 나를 보는 거울 속의 내 눈이 기준인 인생. 그저 남들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싶다.
인생에서 제일 치열한 시절을 남 눈치 보느라 피곤하게 살아왔으니 이젠 나를 만족시키며 좀 편안하게 살아도 되지 않나 싶다. 그래야 내 인생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