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이 직장이다 보니 나는 내 자식들보다 남의 자식들을 더 오래 보고 있다. 그래서 남의 자식을 더 잘 알고 남의 자식에게 더 많이 신경 쓴다. 이 점이 나를 깊이 고뇌하게 한다.
연차가 쌓일수록 느끼는 것이 점점 아이들이 뭐랄까. 이상해진다고 해야 할지, 부족해진다고 해야 할지. 내가 근무하는 곳이 소규모 학교라 그런 아이들이 모이는 것인 건지, 전반적으로 하향 평준화되는 건지, 지방 소도시라 그런 건지, 경제가 안 좋아서 부모들이 신경을 못 쓰는 건지. 하여간 나 혼자 이유를 찾느라 바쁘다. 이유라도 찾아야 답답한 마음에 위안이 될 것 같아서이다.
오늘도 몇 날 며칠 얘기하고 또 얘기해서 얻어낸 나의 간절한 기다림에 부정적인 응답이 왔다. 학기 초부터 너무너무 산만하고 집중하지 못하고 누적된 학습 결손이 심각하여 개인지도도 벅차하는 아이를 어떻게든 구해보겠다고 귀찮은 서류작업을 해서 부모님 동의서를 받아오라고 했는데 너무도 단호하게 안 하시겠단다. 물론, 전화를 해도, 문자를 드려도 무반응일 때 뭔가 일이 쉬이 풀리지 않을 거란 예상은 했었지만 역시나 실망, 절망이다. 이를 어쩐다. 여기서 멈춰야 할 것이냐, 더 해 봐야 할 것이냐. 아이보다 부모를 설득하는 게 더 어려운 최고 난도 작업이다.
내 코가 석 자. 집에 이미 내가 돌봐야 할, 그러니까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기본적인 의식주만 해결해 주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방과 후 활동 매니저 역할은 물론이고 정신적 매니저 역할 즉, 마음도 들여다봐야 하고, 서로의 갈등도 조율해야 하고, 그들의 고민도 들어줘야 하고, 학교 생활은 어떤가 한 번씩 물어봐 주기도 해야 하고, 그냥 재미난 얘기도 한 번씩 주고받아 주어야 하는 그런 분주한 엄마인 내가 다른 이에게 줄 마음의 여유 따윈 별로 없다.
그런데 자꾸 ‘낮의 내 새끼들’이 그 조금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더 크게 더 크게 자리를 잡고 들어앉으면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마음을 몽땅 쏟아버리고 마는데. 그 마음이 이런 식으로 갈 길을 잃으면 참 힘들다. 나도 부모지만, 이 아이의 부모는 도대체 어떤 상황이길래, 어떤 생각으로 아이를 키우길래 학교에서 이렇게 애걸복걸하는데도 싫다고 거부하는 건지. 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건지, 보고 싶지 않은 건지, 차라리 진짜 내 새끼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를 어쩐다. 엑스자가 쳐진 서류를 바라보며 갈등한다. ‘그냥 접어? 그냥 보여도 안 보이는 척, 눈 감고 귀 닫고 모르는 척, 일 년 보내고 말아? 아이고. 갈 데까지 갔구먼. 이런 생각을 다 하고. 내가 진짜 그만둘 때가 되었나 보네’ 한숨 푹 쉬고 서류를 들고 교무실로 간다. “교감선생님. 전화 한 번만 해주세요. 저 이 아이 한 번만 더 시도하고 싶어요.”
그래도 안 되면 나는 정말 일 년 내내 마음 앓이를 하고 말 것이다. 요즘 부모가 너무 아이를 다그쳐서 문제라고 난리지만, 한편에서는 너무 방임해서 난리다. 사회의 사각지대. 이렇게 크는 아이들도 많다. 마음에 구멍이 뚫리고 기본적인 학습 능력뿐만 아니라 생활 능력 습득에 구멍이 뚫려서 몸만 자라는 아이들이 많다. 그 아이들이 너무 걱정된다. 오지랖도 팔자다.
‘너를 어쩌지.’ 지긋이 바라보는 눈길에 아이가 눈을 맞춰 온다. 그냥 씩 웃어준다. 아이가 따라 웃는다. ‘그래. 학교에서라도 웃고 떠들고 그래라. 내가 여기라도 편안한 공간으로 만들어주마. 그래도 공부는 하자. 어디 가서 사기는 당하지 말아야지.’ 오늘도 나는 ‘낮의 내 새끼들’에게 마음을 쏟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