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 나도 처음이라 그랬다.

by 우아

나름 굴곡진 대학 시절을 보냈다. ‘아니 무슨 대학이 시간표가 정해져서 통보해? 내가 선택하는 거 아닌가?’ 지나치게 친절한 대학교였다. 타 대학에 다니는 친구를 통해 ‘드랍’이라는 단어를 알았다. 선택과목을 수강하다가 성적이 안 나올 것 같거나 나랑 정~ 안 맞으면 도중에 그만둔다는 그 전설적인 단어. 우리에겐 그런 친절한 단어 따윈 없었다. 그냥 정해진 대로 착실하게 4년의 대학 시절을 보내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월의 풍파가 순순히 우리를 놓아주지 않았고 순둥순둥 교대생이 4년 재학시절 무려 두 번이나 수업 거부를 했었다. 2학년 때 1번, 4학년 때 1번. 2학년 것은 기억이 잘 안 나서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사실 내가 그때 놀이패 율동을 해서 애써 잊고 싶었다는 말은 차마 못 하겠다.

4학년 땐 제법 심각했다. 임용을 준비해야 하는 4학년을 선두로 서울교대에 모여 대규모, 나름 대규모 집회도 했었다. 차갑고 딱딱한 서울교대 강당에서 노숙도 했었다. 임용고시를 보네, 안 보네, 하길래 순진한 나는 성심성의껏 데모하느라 공부를 안 했다. 그러나 세상일은 내 맘대로 안되는 법.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한 내막은 몰라도 어찌 되었든 우리는 극적으로 임용고시를 보았고 그나마 시대를 잘 타고난 덕에 겨우 턱걸이로 합격은 했다. 합격과 동시에 연수와 발령을 받는 등 번갯불에 콩 볶듯이 일이 진행되었었다. 그러나 나는, 너무 순수했던, 그리고 너무 열정적이고 정의로웠던 교대생 000은 톡톡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첫 발령지가 무려 고창에서도 제일 끝 바닷가 근처의 소규모 학교였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울면서, 실제로 철철 눈물을 흘리면서 발령받아 가본 학교는 교직원 중 딱 한 명 빼고 모두가 신규였다. 교장선생님도 승진하셔서 첫 발령. 교감 선생님도 승진 첫 발령. 나머지 교사 6명이 신규 발령. 그럼, 나머지 한 명은 어떤 분이냐? 나보다 1년 선배님. 그리하여 우리는 신규가 교무 되고 교직 경력 2년 차가 연구되는 기이한 교직원 형태를 띠게 되었다.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개학 첫날부터가 엉망이었다. 누가 누구를 환영해 준단 말인가. 학생들이 선생님을? 선생님이 학생들을?

복이 많았던 나는 그중에서도 영(young)한 그러니까 젊은 축에 속해 짬밥에 밀려 학생 수가 제일 많은 2학년을 떠맡게 되었다. 특수반도 없는 단 학급 짜리 시골 학교에서 그때 당시 32명 학급은 거대학급이었다. 한글을 뗀 건지 만 건지 정체불명의 외계인 같은 아이들이 나만 쳐다봐도 부담인데, 나를 쳐다보기는커녕 지들 마음대로 보고 싶은데 보고 하고 싶은 거 하는데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Are you Korean? 왜 한국말을 못 알아듣니?”

정말 눈물겨운 나날이 이어졌다. 뭔 애들이 하루가 멀다고 싸우고 울고 수시로 돌아다니고 이르고 물어 보고 하다못해 줄 서는 것도 제대로 못 했다. 정말 대환장 파티가 이어졌다. 그 와중에 가정방문이란 걸 하랬다. 시골 각지 구석구석에 포진된 아이들의 집을 한 가정 한 가정 방문하여 보호자와 대화하고 그 가정의 상태를 살펴보고 오는 그 가정방문. 다른 반의 두 배 이상이던 아이들을 다 돌아봐야 하는 고난의 행군. 아니 뭐 내가 그렇게 연식이 오래된 사람도 아닌데 가정방문을 할 때는 정말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전통 한옥에 부뚜막이 있고~ 툇마루가 있고~ 솥뚜껑 달린 가마솥에 밥을 해 먹는~ 그런 가정, 그 당시엔 흔하지 않던 다문화가정 자녀인데 부모가 아닌 쪽 찐 머리에 꼬부랑 조모와 외로움 풀풀 풍기며 사는 형제 가정, 그 아이의 집만을 위해 일부러 낸 길을 따라가고 가고 가면 나오는 외로운 새집 한 채와 그 가정의 사업장, 딱 봐도 특수반인데 학교에 특수반이 없어 슬픈 아이와 엄마가 사는 단칸방 가정까지…. 32가정 알록달록 정말 다채롭기도 하였다.

물어 볼 사람 하나 없는 게 가장 힘들었다. 공문 작성 방법부터 모두 모여 공부하듯 교감 선생님께 직접 배워서 했다. 매일 다시 고치고 다시 고치고. 신기하게도 그 학교의 공문함은 전년도 공문 하나 없이 텅텅 비어 있었다. 참고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 그때만 해도 수작업 시대였다. 틀리면 다시 작업해서 출력해서 결재를 받으러 가야 했다. 앉아 있지도 않는 아이들 데리고 수업하랴, 정말 순수하게 애들 보랴, 공문 쓰랴 진짜 힘들었다. 마음대로 되는 게 없으니, 아이들에게 짜증이 늘어갔다. 나는 순도 백 프로 탁아소를 운영하는 기분이었다. 제발 시간아, 가라~ 빨리 가라~

그래도 세월은 어찌어찌 흘러 1년의 세월이 지나고 나는 드디어 교직 2년 차가 되었고 전부 신규였던 우리 학교 구성원에는 해가 바뀌었어도 변화가 당연히 없었다. 두구두구두구두구~ 긴장되는 새 학년 배정 시간. 아주 아쉽게도 아무 힘도 없던 나는 그 골칫덩어리 학년을 다시 떠안게 되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폭포수처럼 가렸다. 나는 그렇게 2년간 그 아이들, 순수한 시골 아이들에게 몹쓸 선생질을 하였고 도망치듯 학교를 옮겼다. 그래도 잘한 점이 있었다면 그 학교를 나올 땐 그들을 2개 반으로, 아주 심사숙고하여 분반하여 주고 나왔다는 점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나는 정말 지지리도 운이 없었다는 얘기고. 어느덧 30줄을 넘어서 누군가는 부모가 되었을, 또 누군가는 짱짱한 젊음을 누리고 있을 그때 그 아이들에게 좀 많이 늦었지만, 한마디 하고 싶다.

“미안했다. 얘들아. 나도 처음이라 서툰데 하필 너희들을 연속으로 맡아서 지은 죄가 참 컸다. 정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죄가 마구 생각나려 해 무척 괴롭구나. 우리 그냥 서로 잊으면 안 될까나? 제발 잊어주렴. 그 시절, 아무것도 몰라 발 동동거리던 신출내기 여선생의 만행은 그냥 재미났던 추억으로 포장하여 기억해 주면 안 되겠니? 아니 잊어버리면 안 되겠니? 나도 처음이라 그랬단다. 우리 서로 잊어버리자 쿨하게! 콜? 그럼, 이제 내 눈을 바라봐~ 나만 바라봐! 내 눈! 자, 당신은 24년 전 그때로 돌아갑니다. 당신과 나는 만난 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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