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남자 복이 참 많은 사람이다. 온통 남자들뿐이다. 그래서 우리 집은 뭔가 모든 게 칙칙하다. 빨래를 갤 때도 칙칙하고 물건을 정리할 때도 칙칙하고 대화를 할 때도 그 분위기와 내용이 참 칙칙하다. 그들과 함께 생활하는 나는 어느덧 무늬만 여자이고 남성성이 물씬 풍기는 걸크러쉬가 되어가고 있었다. 사용하는 단어 또한 크하~ 아들만 키우는 엄마의 내공이 묻어나는 전문용어가 입에 찰싹 붙어 나도 모르게 줄줄 나와버린다.
“원식이! 투식이! 일어나! 어젯밤에 뭐 했어? 왜 못 일어나? 학교 가야지! 너네 학교지, 내 학교냐? 셋 센다. 하나! 둘! 셋! 일어나!!! 삼식이! 너는 일찍 일어났으면 학교 갈 준비하고 놀라고 했지! 옷 입어!” 따발총이다. 나의 아들들은 군대 가서 조교하면 잘 할 것이다.
이런 우리 집에 인간이 아닌 새로운 생명체가 기거하기 시작했다. 시골 출신 아버지를 쏙 빼닮아 새벽 잠이 없는 우리 막둥이가 주도한 일이었다. 아들 셋의 넘치는 에너지를 감당하기엔 뷰 포인트의 아파트는 너무 삭막한 공동주택이었고 내쫓기기 전에 기분이라도 좋자며 제 발로 주택으로 이사를 나왔다. 그제서야 마음의 평화를 얻는가 싶었는데, 우리 막둥이가 주말이면 새벽에 일어나 이웃집에 가서 강아지들을 깨우는 것이었다. 하필 그 집엔 강아지가 무려 여섯 마리쯤 있었고 그 강아지들은 그들의 본능에 충실하게 낯선자의 방문에 사납게 울부짖어 온 동네를 떠들썩하게 했다.
“삼식아, 내일 아침엔 건넛집에 가지 마. 9시 넘어서 가. 제발” 아침잠이 많은 나는 도저히 막둥이의 기행을 막을 수 없었고 잠옷에 겉옷만 겨우 걸치고서 “너 이놈, 삼식이!!!”를 외치며 아침 댓바람부터 달리고 달려야 했었다. 몇 날 며칠의 실랑이 끝에 어르고 달래 협상하여 강아지 비슷한 생명체를 집에 들이게 되었다. 아니... 아무리 이해할래야 이해할 수 없는 남성체가 넷이나 집에 있는데 또 다른 생명체라니. 주변인들에 대한 민폐를 피해 한지 주택으로 이사까지 왔는데 이 무슨 낭패란 말인가. 그리하여 우리 집엔 이름도 낯선 ‘렉돌’이라는 고양이 두 마리가 함께 기거하기로 하였으니. 왜 한 마리가 아니고 두 마리냐. 그것은 수컷 한 마리만 데리러 갔던 나의 남편이 한쪽 구석에 외로이 쭈그리고 있던 암컷 고양이가 안쓰러워서 차마 두고 오지 못하였다나 어쨌다나.
“여보세요. 집에서 고생하는 암컷 ‘정경은’은 안쓰러운 마음이 안 드시던가요? 나한테 왜 이러세요?”
이리하여 우리 집엔 수컷 동물 다섯과 암컷 동물 둘이 동거하게 되었고. 나는 냄새나고 통제 안 되는 인간 수컷들을 먹이고 입히고 양육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긴 털이 슝슝 빠지는 고양이들까지 책임지게 되었다. 그래도 이것들이 눈치는 있어서는 엄청 순하고 예뻤다. 품종묘들은 보통 더 어릴 때 분양이 되는데 우리 고양이들은 약간의 마이너스적 요인이 있어 분양이 안 되고 있던, 한마디로 못난이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양이들의 외모가 좀 출중했다. 남들의 평으론 나를 닮아 고양이들이 우아하다나 어쨌다나. 좀 기분 좋았으나 그래봤자 고양이였다. 말귀는 못 알아듣고, 시도 때도 없이 싸 놓는 끙가에 밥 달라 간식 달라 놀아 달라. 움직일 때마다 빠지는 털들에 아들들 옷엔 하얀 털이 무늬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그래도 생명체이니 이름은 있어야 하지. 특별히 깊은 고뇌를 거쳐 과거는 잊고 즐겁게 살라는 뜻으로 룰루와 랄라라는 작명까지 해주니 이제 정말 이들은 한 가족이 된 것 같았다. 사실 처음엔 너무 심하게 빠지는 털로 인하여 고액을 주고 설치한 선룸을 고양이 공간으로 내주었으나 그 선룸의 특성상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워 가족을! 한 가족을! 그렇게 방치할 수 없어 현관을 내주다가, 방 한 칸을 내주다가, 결국 지금은 온 집안을 고양이들의 공간으로 내주고 인간들은 고양이들이 안 쓰는 공간에서 생활하는 이상한 구조가 되어 버렸다. 주객이 제대로 전도되었다고나 할까.
동거하는 인간들 중 노동자 층에 속하는 나는 퇴근과 동시에 고양이 끙가를 치우고 고양이들 배꼽시계에 맞춰 밥을 준다. 건식 사료와 습식사료를 적당한 간격을 두고 줘야 고양이들이 건강하게 산단다. 이분들이 이젠 고급져 져서 아침, 저녁 식사 전에 연어나 참치 말린 간식, 또는 츄르를 먼저 드셔야 하며 그 간식을 먹기 전엔 간식 통 앞에서 떠나질 않고 우아하게 서 계신다. 참으로 피라미드 꼭대기를 제대로 차지하신 분들이 되고 만 것이다.
이분들이 이렇게 된 이유는 바로 ‘나’다. 내가 세월의 풍파로 인해 침울해 있을 때, 룰루나 랄라를 품에 안고 있으면 이 미물인 고양이가 뭘 안다고 그냥 안겨 있었다. 적당히 따뜻한 체온에, 또 적당히 탄력있는 뱃살을 주물럭 거리거나, 결 좋은 털을 쓰다듬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위로받는 기분이 드는데 참으로 인내심 있게도 우리 룰루랄라가 그러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그냥 안겨 있었다. ‘신통방통도 하지?’
그래서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자연스럽게 고양이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룰루야~ 랄라야~ 엄마가 왔어~ 배고파? 내가 맛있는 간식을 사 왔어~ 내가 너희들 간식 사려고 돈 벌어~” 아침에 눈 뜨면 “룰루~ 랄라~ 엄마한테 인사해야지~ 잘 잤어? 아이구 이쁜이들~ 아이구~ 내새꾸들”
이때 내 말투는 한 때 서비스센터 직원들이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했던 완벽한 ‘솔’ 음이다. 나는 한낱 미물인 고양이 두 마리를 통해 잃었던 ‘솔’ 음을 되찾았다. 나는 회춘했다. 나와 남성들이 함께 사는 인간들의 집을 고양이에게 재물처럼 바쳐 온통 고양이 털에 점령당하여 아침, 저녁으로 돌돌이를 들고 다니며 전투적으로 돌돌이를 돌리는 반복 행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나는 룰루랄라를 부를 땐 항상 ‘솔’ 음이다.
“룰루~ 랄라~ 이리와~ 사춘기 형아랑 놀지 마! 사춘기 옮아, 그런 거 배우는 거 아니야~ 어디서 눈을 그렇게 뜨지? 안돼~ 룰루는 엄마를 그렇게 보면 안 되는 거야~” 고양이를 키우게 된 원인 제공자 우리 집 막둥이는 그럴 때마다 새우눈을 하고 룰루랄라를 질투한다. “엄마는 저보다 룰루랄라가 더 좋죠?” 콧김을 내뿜는다. “야! 너는 엄마 아빠가 있잖아! 쟤네는 없어! 얼마나 보고 싶겠어~ 그러니까 우리가 예뻐해 줘야 해~” 내가 생각해도 참 잘 지어낸 말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아들의 말문을 막아버린 나는 억지맞춤 정당성을 갖춘 채 오늘도 룰루랄라를 부른다. 잃었던 콧소리 ‘솔’음을 장착한다.
“룰루야~ 랄라야~ 엄마한테 와~ 룰루~ 랄라~” 나는 어느덧 고양이의 어미가 되어 있다.